||<-5><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edc89><tablewidth=100%><bgcolor=#fedc89> '''[[고려/역대 왕비|{{{#670000 고려의 역대 왕후}}}]]''' || ||<width=30%><bgcolor=#ffffff> [[신종(고려)|신종]]비[br][[선정태후]] ||<bgcolor=#ffffff> {{{+1 →}}} ||<bgcolor=#fedc89><width=30%> '''희종비'''[br]'''성평왕후''' ||<bgcolor=#ffffff> {{{+1 →}}} ||<bgcolor=#ffffff><width=30%> [[강종(고려)|강종]]비[br]사평왕후[br][[원덕태후]]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edc89><bgcolor=#fedc89> '''{{{#670000 시호}}}''' ||<bgcolor=#ffffff>'''정장성평왕후(貞章成平王后)''' || ||<bgcolor=#fedc89> '''{{{#670000 존호}}}''' ||<bgcolor=#ffffff>함평궁주 원비(咸平宮主 元妃) || ||<bgcolor=#fedc89> '''{{{#670000 작위}}}''' ||<bgcolor=#ffffff>태자비(太子妃)(?) || ||<bgcolor=#fedc89> '''{{{#670000 관저}}}''' ||<bgcolor=#ffffff>함평궁(咸平宮) || ||<bgcolor=#fedc89> '''{{{#670000 본관}}}''' ||<bgcolor=#ffffff>장흥 임씨 || ||<bgcolor=#fedc89> '''{{{#670000 능호}}}''' ||<bgcolor=#ffffff>소릉(紹陵) || ||<bgcolor=#fedc89> '''{{{#670000 생몰연도}}}''' ||<bgcolor=#ffffff>? ~ 1247.08 || [목차] == 개요 == [[희종(고려)|희종]]의 왕후. 성평왕후의 시호는 희종 성효대왕과 成 자 돌림이다. 근데 희종의 대표시호는 成 자와 誠 자가 같이 적혀 있는데 성평왕후는 전자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 가족관계 == 성평왕후는 고려 왕실의 일원이다. 부계는 [[현종(고려)|현종 원문왕]]의 후손으로 [[정간왕]]계이다. 정간왕의 삼남 왕영 → 왕영의 장남 왕정 → 왕정의 장남 왕성 → 왕성의 차남 왕진 → 성평왕후 순이다. 성평왕후는 동성혼을 피하기 위해 모계를 따라 임씨라 했는데, 이는 외증조모 [[공예태후]]의 성씨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성평왕후는 [[명종(고려)|명종 광효왕]]의 외손녀로, 명종 → 연희궁주 → 성평왕후 순이다. 아들 다섯 명, 딸 다섯 명을 낳았다. 그 중 맏아들 왕지는 [[태자]]였고 맏딸은 [[안혜태후]]다. == 생애 == 성평왕후와 희종이 언제 결혼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고종이 올린 시책문에 따르면 성평왕후는 [[희종(고려)|상황(上皇)]]의 왕후가 되기 전에 [[신종(고려)|성황(聖皇)]]이 궁궐에 데리고 왔다 하니, 희종의 태자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희종은 태자가 되기 전부터 결혼했던 아내가 있었다. 희종이 태자가 되자 자연히 아내도 태자비가 됐지만,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만들기 위해 이 희종의 아내를 내쳤다. 결국 태자비는 폐비됐지만 최충수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진 못했는데, 자세한 건 [[최충수]] 문서 참조. 여하튼 공석이 돼 버린 태자비 자리를 신종이 성평왕후를 뽑아 희종에게 중매한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 태자비가 됐다는 기록은 없다. 시책문에만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즉 굴러들어온 돌인 성평왕후는 꽤나 위태로운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늙은 시아버지 신종이 양위하고 남편 희종이 즉위한 뒤, 원비가 되었지만 궁주호는 7년 뒤에야 받을 수 있었다.[* 고려 왕후의 존호는 'OO궁주 - O비'이다.] 그렇게 함평궁주 - 원비[* 책봉문엔 왕비 - 함평궁주(王妃 - 咸平宮主)로 돼 있다.]가 되어 공식적인 왕후가 되었다. 허나 남편이 [[수창궁]]에서 [[최충헌]]을 사살하려 했지만 실패, 역으로 강제 퇴위를 당했다. 현 [[인천광역시]]로 남편과 맏아들이 유배되었고, 본인만 [[만월대|본궐]]에 남게 되었다. 성평왕후는 궁궐에 남겨진 이유는 아마 차기 왕이었던 [[강종(고려)|강종]] - [[고종(고려)|고종]] 부자의 가까운 친척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이후 [[고려]] - [[몽골]] 간 전쟁이 일어나자 조정은 [[고려궁지]]로 천도했고, 왕후 역시 따라갔다. 강화경(江華京)을 나가지 못하고 죽었고, 사위 고종이 시호를 올렸다. [[분류:1247년 사망]][[분류:고려의 공주]][[분류:고려의 왕비]][[분류:장흥 임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