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以性 (1595년 ~ 1664년) [[조선]] 중기의 인물. 자는 여습(汝習), 호는 계서(溪西). 성안의의 아들. [[경상북도]] [[봉화군]] 출신. 학업에 열중해 13세 때 정경세가 "크게 될 인물"이라 평가했고 1610년에 진사가 되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다가 1627년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1634년부터 1659년까지 정언, 교리, 부수찬, 부교리, 지평, 부수찬, 부응교, 교리 등의 관직을 여러 번 지냈고 중간에 관직이 교체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기록된 관직인 정원이 [[사간원]]의 정6품 관직이고, 과거 병과로 급제했다는 것을 고려할 때 1627년과 1634년 사이에도 관직생활을 했을 것이나, 직급이 낮아서 기록이 안 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637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호남 지방을 순찰했으며, 1639년, 1647년에도 암행어사로 파견된다. 1648년에 [[담양군|담양]]에서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축조하고 나무를 심었고, 그가 죽고 난 이후에 황종림이 제방을 축조해 관방제림이라는 숲을 조성하게 되었다. 1660년 1월에는 [[강계시|강계]] 부사가 되었고 [[진주시|진주]], 강계 등 4개의 고을을 다스렸으며, 사후에는 1695년에 [[청백리]]로 뽑혔고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계서유고]]가 있고, 그가 살던 생가인 계서당은 후손들이 중건해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보존되고 있다. [[춘향전]]의 [[이몽룡]]의 모델이다. 이몽룡이 암행어사인 것은 그가 3차례에 걸쳐서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 지방을 순찰한 것을 반영한 것이며, 이 경험을 [[호남암행록]]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이몽룡이 탐관오리 변학도를 비판한 시는 실제로 성이성이 지은 시이다. [[분류:조선/인물]][[분류:창녕 성씨]][[분류:1595년 출생]][[분류:166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