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 align=right><table width=440><table bordercolor=#000000><table bgcolor=#fff,#191919><bgcolor=#000000> '''{{{#ffffff {{{+1 선우영빈}}}[br]鮮于永彬[*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나오는 명판에는 하야시 타로(林太郞)라고 나온다.]}}}'''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선우영빈.jpg|width=100%]]}}} || ||<|2><width=100><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출생''' ||[[1909년]] [[7월 25일]]|| ||[[평안남도]] [[평양직할시|평양부]] 부산면 수산동[br](現 [[평양직할시]] [[룡성구역]] 룡성1동)|| || '''사망''' ||[[1978년]] (향년 68~69세)|| || '''본관''' ||[[선우(성씨)|태원 선우씨]]|| || '''학력''' ||[[주오대학]] {{{-2 (졸업)}}}|| || '''상훈''' ||철탑산업훈장 수훈||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조직폭력배이자, [[친일파]]며, [[대한민국]]의 기업인. == 생애 == 선우영빈은 1909년 7월 25일 [[평안남도]] 평양부 부산면 수산동[* 1896년 평안남도 평양부 부산면 수산동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수산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평안남도 순안군 용성리 → 1963년 평양직할시 용성구역 용추동 → 1972년 평양직할시 용성구역 용추이동 → 현재 평양직할시 용성구역 용성1동.][* [[선우(성씨)|태원 선우씨]] 집성촌이다.][* [[매일신보]] 1936년 07월 07일자 기사 夜市街를 물드린 大邱의 殺人騷動][[http://m.blog.daum.net/new-taoism/41?tp_nil_a=2#footnote_41_48|#]](현 [[평양직할시]] [[용성구역]] 용성1동)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하였다. [[일본]] [[우익]]의 원조 [[도야마 미쓰루]][* 일명 두산만(頭山 満). 아시아주의의 대표격인 인물이고, 일본 국가주의자의 상징중 하나이다. 을미사변의 배후이자 경술국치의 뒤에서 활약한 것으로 손꼽히는 [[겐요샤]]의 창시자이고, 갑신정변 이후의 김옥균이나 손문을 지원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미디어에는 도호야마 미쓰루로 알려져 있으나, 頭山滿에서 頭山는 토-야마라고 읽는다. 도야마 미츠루가 아끼던 600년 전에 만들어진 칼은 [[천황]]이 한때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에게 발탁되어 [[겐요샤]][* [[을미사변]]을 주도한 단체이다. 패망 후 연합군에 의해서 강제 해산당한다.]에 들어가 [[사무라이]]가 되어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해 낭인들을 [[한반도]], [[만주]], [[중국]] 등에 보낼 때 한반도 대표로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메이지초([[명동]])에서 활동하면서 [[김두한]]과 대립 이후 김두한과 친분을 맺고 곤경에 처한 김두한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야마 같은 일본 제국주의적 성향이 아닌 사무라이를 중시했다. 김두한과 대립 당시 부하가 암수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패배를 인정하고 자신의 성씨 선우씨 종친회를 지원하는 등에 다른 친일파들과 상반된 활동을 벌인다. 일본이 패망하고 광복을 맞이했을 때 부인과 부하들을 전부 일본으로 보내고 그는 조선에 남아 고향인 평양으로 올라갔으나 남북분단이 되어 북쪽이 공산정권이 세우게 되자 월남하였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당시 1년 6개월을 받았고[*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방해로 와해되었다.] 자책한 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광역시|부산]]으로 내려가 일본삼영무역(日本三永貿易)주식회사를 창립, 사장으로 있으면서 일본과의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 그는 서울국제시장(國際市場)주식회사 부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한편 1956년에는 건설산업(建設産業)주식회사[* 1956년 선우영빈이 설립한 건설회사로 지금의 [[명동성당]] 앞 보림빌딩 자리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남대문 상동교회 예배당(새로나쇼핑)도 이 회사가 건축했다. 그러나 선우영빈이 사망한 후 1982년 최종 부도 처리, 공중분해되었다.]를 설립, 경영하면서 1953년부터 1963년까지 한국건설업회(대한건설협회 전신) 이사를 지냈고, 1968년부터 서울 지부장을 역임하고,[[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06220009920201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8-06-22&officeId=00009&pageNo=2&printNo=699&publishType=00020|#]] 1974년 [[서울 지하철]] 건설 공로로 철탑산업훈장을 받는 등[[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81500099207010&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74-08-15&officeId=00009&pageNo=7&printNo=2601&publishType=00020|#]] 기업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았다고 한다. 1978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에도 같은 모티브의 인물이 등장하나 허구에 가깝다. 진위여부는 가릴 수 없지만 [[김동회]]는 선우영빈이 하야시라고 불렸다고 하며 자신을 스카웃했다고 말했다. == 대중매체에서 == === 영화 [[장군의 아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하야시(장군의 아들))] === 드라마 [[야인시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하야시(야인시대))] === [[개그공화국]] 코너 죽거나 힘들거나 ===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2_328064_1338341121647915.gif]]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med_2012_328064_1338341121647919.gif]]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공화국]]의 코너 죽거나 힘들거나에서 희극인 나상규가 이 캐릭터를 패러디해 하야시 역을 맡았다. [[분류:평양직할시 출신 인물]][[분류:태원 선우씨]][[분류:대한민국의 조직폭력배]][[분류:야쿠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1909년 출생]][[분류:1978년 사망]][[분류:주오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