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서출]][[분류:전주 이씨 석보군파]] [include(틀: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3><tablealign=right><table width=400><tablebordercolor=#94153E><#94153E> {{{#gold '''조선 정종의 왕자'''[br]{{{+1 '''석보군[br] 石保君'''}}}}}} || ||<-2><width=30%><#94153E> '''[[작호|{{{#gold 작호}}}]]''' ||<(> 석보정(石保正) → 석보군(石保君) || ||||<:><#94153E> '''[[시호|{{{#gold 시호}}}]]''' ||<(> 정혜(靖惠) || ||||<:><#94153E> '''[[본관|{{{#gold 본관}}}]]''' ||<(> [[전주 이씨|전주]](全州) || ||||<:><#94153E> '''[[이름|{{{#gold 이름}}}]]''' ||<(> 복생(福生) || ||||<:><#94153E> '''[[아호|{{{#gold 호}}}]]''' ||<(> 검묵당(儉默堂) || ||||<:><#94153E> '''{{{#gold 부왕}}}''' ||<(> [[정종(조선)|조선 정종]] || ||||<:><#94153E> '''{{{#gold 생모}}}''' ||<(> 숙의 윤씨(淑儀尹氏) || ||||<:><#94153E> '''{{{#gold 부인}}}''' ||<(> 학성군부인 원주 김씨(原州 金氏) || ||||<:><#94153E> '''{{{#gold 자녀}}}''' ||<(> 3남 5녀 || ||||<:><#94153E> '''{{{#gold 묘소}}}''' ||<(>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양촌리 || ||<|2><:><#94153E> '''{{{#gold 생몰[br]기간}}}''' ||<:><#94153E> '''[[음력|{{{#gold 음력}}}]]''' ||[[미상]] ~ [[미상]] || ||<:><#94153E> '''[[태양력|{{{#gold 양력}}}]]''' ||[[미상]] ~ [[미상]]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초기의 왕족. [[정종(조선)|정종]]의 9남이다. 어머니는 숙의 윤씨이다. 친형제로는 형 [[수도군]]과 [[임언군]] 및 남동생 [[장천군]]과 여동생 인천옹주가 있다. 생전에는 석보정이었으며, 석보군은 사후에 추증된 것이다. [[전주 이씨|전주이씨]] 석보군파의 파시조이다. == 생애 == 본성이 청렴검소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며 학문에 통달하여 ‘대문장가’라 일컬었다. 그러나 관직에는 뜻이 없어서 늘 산간에 은거하고 세상 일에 관여치 않았다. 그러나 사건사고는 꽤 일으켰던 듯하다. 1427년(세종 9년) 음행으로 [[원주시|원주]]로 [[귀양]]을 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5009_002|#]] 1436년(세종 18년)에는 [[세종(조선)|세종]]에게 [[황해도]] [[해주]]에 있는 [[온천]]에 목욕한다고 말하고서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하라는 목욕은 안하고]] [[기생]]이 있는 [[춘천]]으로 가서 며칠간 머무르며 [[사냥]]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저 때 자신을 형 [[순평군]]이라고 속였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810023_002|#]] 이 일은 문제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저 일이 벌어진 때가 자신의 아버지인 [[정종(조선)|정종]]의 기일이었다.(...) 그리고 형을 사칭한 사칭죄도 저질렀으며, 무엇보다 왕을 속인 기군망상죄를 범한 것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810023_002|#]] 기군망상죄는 기본이 사형으로 다스리는 엄청난 중죄였다. 그럼에도 종친이라 하여 직첩을 회수당하고 외방으로 유배되는 것에 그쳤다. [[사헌부]]에서는 왕을 속인 그를 대죄로 다스려야한다고 했으나 세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810025_002|#]] 1444년(세종 26년)에 명선대부 석보정에 봉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07001_002|#]] 이후 그와 관련한 기록은 없다. == 사후 == [[무덤|묘]]는 처음에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랑구]] [[미아리]]에 있었다. 한동안 실전되어 위치를 모르다가 11대손 이우형이 찾아서 정비했다. 이후 석보군 묘역이 [[1.4 후퇴]] 때 내려온 [[실향민]]들의 주거지로 결정되자 1959년 2월에 현재의 자리인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양촌리로 옮겼다.[[http://rfo.co.kr/view_party.php?refnum=032|#]] 1872년([[고종(대한제국)|고종]] 9년) 3월에 석보군(石保君)으로 추증되었고[[http://sillok.history.go.kr/id/kza_10903023_003|#]],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봉되었다.[[http://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09_03A_28A_00220&solrQ=query%E2%80%A0%EC%A2%85%EC%9D%98%EA%B5%B0$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ST_AA$solr_toalCount%E2%80%A02$solr_curPos%E2%80%A01$solr_solrId%E2%80%A0BD_ITKC_ST_Z0_A09_03A_28A_00220|#]] == 여담 == * 석보군의 11대손 이우형이 석보군의 묘를 찾는 과정이 극적이다. 이우형이 석보군의 묘소를 찾아 여러 날을 헤매던 중, 우연히 [[미아리]]에서 “우리 석보골로 나무하러 가자”는 [[어린이]]들의 말을 들었다. 아이들에게 무슨 뜻이냐며 물었고, “저 고개를 넘으면 울창한 숲이 있는데 거기에 묘가 있어 옛날부터 석보골이라고 불렀다”는 답을 들었다. 이에 이우형이 어린이들과 함께 석보골로 가보니 황폐해진 묘가 하나 있었다. [[비석]]은 땅에 떨어져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석보정(石保正)’ 3글자가 분명하게 보였다고 한다. == 가족과 후손 == 대경공 김연지의 딸인 학성군부인 원주김씨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다. 딸들은 각각 성숙, 송계장, 홍맹손, 손효장, 정윤서와 혼인했다. 장남은 연산부정이고 차남은 인양부정이며 3남은 곡성군이다. 곡성군은 숙부 [[임성군]]의 [[양자(가족)|양자]]로 출계했다. 남은 아들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석보군파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