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서진구(徐鎭九) || || 본관 ||[[이천 서씨]] || || 생몰 ||[[1921년]] [[9월 24일]] ~ [[1944년]] 7월 || || [[출생지]]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회룡리[* [[이천 서씨]] 집성촌이다.] || || 사망지 ||[[경상북도]] [[문경시]]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서진구는 1921년 9월 24일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회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9년 [[경북대학교/학부/사범대학|대구사범학교]]에 재학하던 중 <반딧불>이라는 비밀교양지를 발간해 항일사상이 담긴 문예작품을 창작, 수집하는 등 문예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141년 2월 15일에 동교생 권쾌복(權快福), 배학보(裴鶴甫), [[문홍의]]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시 대봉정 소재 유흥수(柳興洙)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했다. 다혁당은 대구사범학교에 조직된 비밀결사 문예부, 연구회의 항일정신을 계승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한 것으로, 문학, 미술, 학술, 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해 조국 독립을 꾀했다. 또한 다혁당은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해 타교생 및 일반인까지도 포섭대상으로 삼았다. 조직으로는 당수, 부당수를 두었고 그 아래로 총무, 학술, 문예, 연구, 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서진구는 그 중 연구부원의 일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당원의 비밀엄수 및 절대복종, 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했다. 또한 이들은 동교 내 일본인으로 구성된 연습과 학생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심상과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모색했다. 그러나 1941년 7월 <반딧불>이 일본 경찰의 손에 들어가면서 다혁당의 정체가 탄로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서진구는 2년여 간 미결수의 상태로 혹독한 고문을 치르다가 1943년 10월에야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이듬해인 1944년 7월경 자택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서진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88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문경시 출신 인물]][[분류:1921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이천 서씨]][[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