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right><tablebgcolor=#fff><table width=450><tablebordercolor=#0047a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서오룡}}}[br]徐五龍'''}}}}}}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오룡.jpg|width=100%]]}}} ||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창씨명''' ||오오모토 토오루(大本徹)[br]오오모토 코오스(大本爀洙) || || '''족보명''' ||서혁수(徐爀洙) || || '''이명''' ||서오룡(徐吳龍)·최용길(崔龍吉) || || '''본관''' ||[[달성 서씨]][* 현감공 제(濟)파. 달성 서씨 23세 '''수(洙)''' 원(源) 호(浩) 항렬.] || ||<|2> '''출생''' ||[[1911년]] [[6월 1일]] || ||[[경상북도]] 대구부 동중면 산격동[br](현 [[대구광역시]] [[북구(대구)|북구]] [[산격동]])[* [[달성 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서상락]]도 이 마을 출신이다. 산격동 산79-1번지에는 산격동 입향조인 서침(徐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5898|구암서원]]이 있다.] || || '''사망''' ||[[1950년]] [[10월 10일]]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서오룡은 1911년 6월 1일 경상북도 대구부 동중면 산격동(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서 종6품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서사도(徐思道)의 10대 종손인 아버지 서진태(徐鎭泰)와 어머니 [[경주 최씨]] 최정화(崔廷華)[* 대암(臺巖)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b_A1586_1_0019228|최동집]](崔東㠍)의 9대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다.]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0년 12월경, 대구전보사(大邱電報社) 인쇄소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업학교]] 및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비밀결사 <[[프롤레타리아]] 과학연구소 조선 제1호 지국>을 결성했다. 이후 1931년 1월 21일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신사회 건설을 주장하는 격문을 대구 시내에 살포했으며, 같은 해 4월 대구상업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그리고 대구상업학교 졸업 후인 같은 해 7월에는 <프롤레타리아 과학연구소 지국뉴스> 제1호를 간행하고 11월에 제2호를 등사·인쇄하여 [[만보산 사건]]이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일환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12월경, 2차례에 걸쳐 대구부 대봉정(현 대구광역시 [[남구(대구)|남구]] [[이천동(대구 남구)|이천동]]) 소재 [[일본제국 육군]] 보병 제80연대와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 구내, 대구부 칠성정(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2가]]) [[대구역]] 앞 등지에 [[반전]]·[[반제]] 격문을 살포했으나,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와 대구경찰서 고등과의 끈질긴 수사 끝에 곧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1932년 1월 23일 대구전보사 인쇄소 주인 佐佐木隆, 대구부 삼립정(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삼덕동(대구 중구)|삼덕동]]) 소재 경북잠종업조합(慶北蠶種業組合) 사무원 瀨戶口茂 등 대구상업학교 동기생들을 비롯해, 대구상업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권태우(權泰禹)·서상조(徐相祚)·정학진(鄭學鎭), 대구상업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암이(金岩伊)·강신중(姜信重)·이풍택(李豊澤) 등 동지 8명[[http://db.history.go.kr/id/npda_1932_01_24_v0002_0130|#]]과 함께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http://db.history.go.kr/id/su_010_1932_01_23_1080|#]], 같은 해 12월 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보안법·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18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222&evntId=0034988883&evntdowngbn=Y&indpnId=0000020086&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광복]] 후 좌익 활동을 벌였다가 당국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0일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서오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의 공산주의자]][[분류:달성 서씨]][[분류:북구(대구) 출신 인물]][[분류:1911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