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관련 정보]] ||<-2><tablealign=right><tablebgcolor=#fff><table width=450><tablebordercolor=#0047a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서상돈}}}[br]徐相敦'''}}}}}}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news.catholic.or.kr/20110328151812.jpg|width=100%]]}}} ||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 || '''족보명''' ||서상돈(徐相'''燉''') || || '''자 / 호''' ||윤리(潤璃) / 시찰(視察) || || '''본관''' ||[[달성 서씨#s-1.1|대구 서씨]][* 도위공(都尉公) 경주(景霌)파. 24세 상(相) 항렬.] || ||<|2> '''출생''' ||[[1850년]] [[11월 10일]] || ||[[경상도]] 김산군 군내면 마좌산리 마잠[br](현 [[경상북도]] [[김천시]] [[지좌동]] 마잠마을)[[http://www.daegucity.net/bbs/board.php?bo_table=B146&wr_id=14|#]] || ||<|2> '''사망''' ||[[1913년]] [[6월 30일]] (향년 62세) ||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군]] 서상면 계산동[br](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계산동(대구)|계산동2가]] [[서상돈고택]]) || || '''묘소'''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물동]] 천주교공동묘원[[http://m.cpbc.co.kr/news/view.php?cid=747076&path=201902|#]]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소개 == [[대한제국]] 때의 민족 운동가이자 사업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 가계 및 어린 시절 === 서상돈은 1850년 11월 10일 [[경상도]] 김산군 군내면 마좌산리 마잠[* 현 [[경상북도]] [[김천시]] 지좌동 마잠마을]에서 [[옹기]]굴 막노동꾼으로 일하던 아버지 서철순(徐哲淳) [[바오로]]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金) 아가다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선조(조선)|선조]]의 서장녀인 정신옹주(貞愼翁主)와 혼인하여 달성위(達城尉)에 봉해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590|서경주]](徐景霌)의 9대손으로, 8대조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b_A1599_1_0025358|서정리]](徐貞履)는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24_009514|진사시에 급제]]하여 종3품 [[개풍군|풍덕]]도호부사를 역임하였고 6대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193|서종헌]](徐宗憲)은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78_014500|진사시]]와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80_006946|문과에 급제]]하여 종2품 [[강원도]][[관찰사]]에 올랐으며, 5대조 서명함(徐命涵)은 [[음서]]로 종6품 용안현감에 오르는 등 직계 선조들이 대대로 관직에 올랐던 문벌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고조부 서광수(徐光修)가 1784년 조선인 최초로 [[세례성사|영세]]를 받은 [[이승훈#s-8|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의 선교로 [[천주교]]로 개종하였고, 이듬해인 1785년 을사추조(乙巳秋曹) 적발 사건 때 연루되어 문중으로부터 제명당한 이후부터는 조정 및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해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서광수와 슬하의 6남 2녀는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데, 이때 서광수의 4남이자 그의 증조부인 서유오(徐有五)는 [[충청도]] 충주목[* 현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던 문중 땅으로 숨어들었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조부 서치보(徐致輔)가 그의 아들 5형제, 서인순(徐隣淳)·서명순(徐名淳), 서철순(徐哲淳), 서익순(徐翼淳) [[요한]], 서태순(徐泰淳) [[베드로]][* 서익순(徐翼淳) [[요한]]과 서태순(徐泰淳) [[베드로]]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를 이끌고 경상도 문경현 여우목[* 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 여우목] 교우촌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80633&path=201507|#]] 훗날 서상돈의 아버지가 되는 서철순은 다시 가족을 이끌고 경상도 김산군 군내면 마좌산리 마잠에 정착하였고, 이 곳에 살다가 서상돈과 그의 동생 서상정(徐相定)[* 이후 1866년 [[병인박해]]로 순교한 막내 숙부인 서태순(徐泰淳) [[베드로]]에 입양되었다.]을 낳았다. 이후 그의 가족들은 경상도 상주목 청동면 석단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 교우촌으로 다시금 이주하였는데, 1857년 10월 6일 부친이 이 곳에서 별세하자 서상돈은 1859년경 어머니·동생과 함께 대구도호부 성서면 새방골 죽전[* 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죽전동(달서구)|죽전동]]]으로 이주하여 인근에 살던 외조부에게 의탁하였다.[[http://www.acatholic.or.kr/coding/sub3/sub1_2.asp?seq=43|#]] 그는 13세 때 집 근처 어느 상인의 심부름꾼으로 들어가 점차 장사일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8세 되던 해, 대구에서 천주교 원로회장 서용서(徐用瑞)[*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외조부이다.]의 후원과, 보부상의 거두인 최철학, 그리고 외사촌형 김종학 등 천주교인들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했다. 그의 사업은 점점 번창하여 [[고령군|고령현]] 개포를 본거지로 삼고 부산에서 안동까지 800리에 달하는 사업 영역을 가진, [[보부상]] 800명을 거느리는 대구에서 손꼽히는 거상이 되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그는 경상도 안동, 군위, 김천, 칠곡, 달성 등의 토지를 매입하여 대지주로 변신하게 된다. 등짐을 지고 재래시장을 전전하던 소년은, 35세가 지날 무렵 대구지역의 유력한 경제인 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 [[국채보상운동]] 이전 === 1894년 45세가 된 서상돈은 조선의 [[탁지부]] 소속 시찰관으로 임명되었다. 담당은 경상도 세정의 총괄. 이때 공명정대하고 청렴한 모습이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서상돈에 의해 파직된 부패한 [[아전]]들이 투서와 고발로 저항하자,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로베르 신부가 증인으로 나서 이것이 거짓임을 증명해주었다고. 1898년 서상돈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하며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였다. 1899년을 전후로 해서 서상돈과 천주교 신자들은 대구읍내 곳곳에 학당을 설립하였으며, [[계산성당]] 교육관 내 한문서당인 [[효성초등학교(대구)|해성재]](海星齋)의 건립도 지원하였다고 한다. 1902년 6품으로 탁지부 재무관에 임용되었으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9_09A_06A_00050_2006_194_XML|#]], 이어 경상남북도 검세관에 임용되었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9_09A_07A_00110_2006_194_XML|#]] 1903년에는 정3품으로 경상남도 시찰에 임용되었다가[[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0_10A_16A_00060_2006_198_XML|#]] 곧 해임되었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0_12A_10A_00190_2006_198_XML|#]] 1904년에는 경상남북도 검세관에서도 해임되었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1_05A_16A_00090_2006_200_XML|#]] 1905년엔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정식 사립학교로 인가받은 대구지역 대표의 여학교인 달서여학교의 설립에 적극 관여하는 등 근대교육의 발전에 힘썼다. === [[국채보상운동]] === 1907년 서상돈은 "[[금연|담배를 끊어]] 1,300만원 가량의 국채를 갚자"는 내용의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며 즉석에서 800원의 거금을 출연했고, 이에 대동광문회 특별회에 참가 중이던 200여명의 회원들도 찬동하여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후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켰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된다. 자세한 내용은 국채보상운동 항목 참조. === 국채보상운동 이후 ===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되자 사업 활동에 전념하여 실업진흥을 통한 민족 실력 양성에 힘쓰다 1913년 6월 30일 64세를 일기로 [[선종(가톨릭)|선종]]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서상돈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후손 === 슬하에 서병옥(徐丙玉)·서병조(徐丙朝)·서병주(徐丙柱)·서병민(徐丙敏)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장남 서병옥은 1899년 [[중추원]]의관에 임명된 바 있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6_11A_24A_00170_2005_182_XML|#]]. 차남 [[http://db.history.go.kr/id/im_107_00086|서병조]]는 [[일제강점기]] 때 경상북도 도평의원 및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경북여자고등학교|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및 [[대륜고등학교]] 설립에 적극 참여하여 대륜고등학교 재단인 대봉(大峯)교육재단 이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후 [[친일인명사전]] 중추원 부문 및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수록되었다. 차남 서병조의 장남 서정식(徐廷植)은 독립유공자 [[민영환]]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셋째 아들 서병주의 장남 서정덕(徐廷德) 루까는 [[경성제국대학]] 문과를 7회로 졸업하고[[https://news.joins.com/article/1291308|#]] [[영남대학교]] 대학원 4대 원장을 역임했다.[[https://graduate.yu.ac.kr/user/indexSub.action?codyMenuSeq=2469957&siteId=graduate&menuType=T&uId=1&sortChar=A&linkUrl=1_5.html&mainFrame=right|#]] [[영남대학교|청구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60년 4월 25일에는 교수 시국선언에 참여하여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하기도 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6465.html|#]] 서병주의 장녀 서정서(徐廷瑞)는 오빠인 서정덕의 경성제국대학 문과 동기생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2016|류홍렬]](柳洪烈)과 혼인하였다. 류홍렬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 대한민국 학술원 원로회원 등을 지냈다. 셋째 아들 서병주의 장손자 서영석(徐榮錫) 베드로는 [[경북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경북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영남대학교]] 농축산대학(현 자연자원대학) 학장을 지냈다.[[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264025|#]] 한편, 차남 서병조의 장손자 서공석(徐公錫) 요한 [[천주교 부산교구]] [[신부(성직자)|신부]]를 비롯해 셋째 아들 서병주의 둘째 손자 서인석(徐仁錫) [[바오로]] 천주교 대구대교구 신부, 서병주의 손녀 서준석(徐俊錫) [[베네딕토회|마오로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수녀 등은 [[성직자]]/[[수도자]]의 길로 나아갔다. == 관련 유적 ==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 (계산동2가 84)에 [[서상돈고택]]이 있는데, 그 옆에는 시인 [[이상화(시인)]] 선생의 고택이 있다. 대구광역시에서는 서상돈 선생의 고택을 복원해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이 곳은 '대구 근대로의 여행' 골목투어 제 2코스로 편성 되어있다. *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 대구광역시 중구 국채보상로 670 ([[동인동2가]] 78)[* 동인동 우체국 건너편]에 조성되어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대구 서씨]][[분류:1850년 출생]][[분류:1913년 사망]][[분류:조선의 가톨릭 신자]][[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