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fff,#191919><width=450px>[[파일:seogiwon.jpg|width=100%]]|| || 이름 ||서기원(徐基源) || || 출생 ||[[1930년]] [[10월 24일]] || || 사망 ||[[2005년]] [[7월 30일]] || || 첫 작품 ||안락사론 (1956) || || 마지막 작품 ||광화문 (1994~1997) || ||<-5><tablealign=center> '''제5회 [[동인문학상]] 수상''' || ||<bgcolor=#ffffff,#191919> [[손창섭]][br](1959) ||<bgcolor=#ffffff,#191919> → ||<bgcolor=#ffffff,#191919> '''서기원, [[이범선]][br]이 성숙한 밤의 포옹[br]오발탄[br](1960)''' ||<bgcolor=#ffffff,#191919> → ||<bgcolor=#ffffff,#191919> [[남정현]][br](1961) || ||<-5> '''제5회 [[현대문학상]] 수상''' || ||<bgcolor=#ffffff,#191919> [[이범선]][br](1959) ||<bgcolor=#ffffff,#191919> → ||<bgcolor=#ffffff,#191919> '''서기원[br]잉태기[br]오늘과 내일[br](1960)''' ||<bgcolor=#ffffff,#191919> → ||<bgcolor=#ffffff,#191919> [[오유권]][br](1961) || ||<-5>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상''' || ||<-5><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334555><tablebgcolor=#556778><bgcolor=#ffffff,#191919> [[파일:KBS_로고.png|width=50]] [[한국방송공사|{{{#000000,#e5e5e5 ''' 한국방송공사 '''}}}]] [[한국방송공사#-6.2.2|{{{#000000,#e5e5e5 ''' 사장 '''}}}]] || ||<width=30%> {{{#ffffff 제8대 [br] [[서영훈|{{{#ffffff 서영훈 }}}]] }}} ||<width=5%> {{{#ffffff → }}} ||<width=30%><bgcolor=#334555> {{{#fee794 제9대 [br] ''' 서기원 ''' }}} ||<width=5%> {{{#ffffff → }}} ||<width=30%> {{{#ffffff 제10~11대 [br] [[홍두표|{{{#ffffff 홍두표 }}}]] }}} ||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소설가]], 언론인, 관료로, [[종교]]는 [[불교]]이다. == 생애 == 1930년 [[경성부]] 종로방 송월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교남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중국]] [[상하이]]에서 유년기를 보내다가 1945년 [[8.15 광복]] 이후 귀국하였다.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중퇴하였다. 1950년 [[대한민국 공군]] [[간부후보생]] 제6기를 졸업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공군 [[소위]]로 임관하여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5년 공군 [[대위]]로 전역한 후 동화통신 기자로 입사해 기자로 입문했고, 1956년 [[황순원]]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소설]] '''암사지도'''로 문학계에 등단하였다. 1957년 조선일보, 1959년 서울신문을 각각 거치며 1960년 '''이 성숙한 밤의 포옹'''으로 [[이범선]]과 동인문학상을 공동수상하였다. 1962년 서울경제신문 기자, 1965년 서울신문 일본특파원, 1967년 동화통신 경제부장을 지낸 후 1970년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회고록을 썼고, 1973년부터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대변인으로 공직자 생활을 시작해 1976년 [[국무총리비서실]] 공보비서관을 거쳐 1979년 최규하 대통령 취임 후 공보[[수석비서관]] 겸 [[대변인]]을 지내며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특별성명'을 발표했고, 행정개혁위원회 상임위원으로서 5공 출범 산파역에 기여했다. 1982년부터 서울신문 상임감사로 5년간 재직하고 1988년부터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1988 서울 올림픽|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을 잠깐 맡다가 이후 [[서울신문]] [[사장]] 겸 한국신문협회장 등을 지냈는데, 1989년 파업 중이던 노조에 대해 강경 대응해 파업을 26일간 지속시키기도 했다. 1990년 [[서영훈]] 대신 [[낙하산 인사]]로 [[한국방송공사]] [[사장]] 겸 한국방송협회장이 되어[* [[시사저널]] 보도에 의하면 원래 그는 서울신문 사장에서 끝을 맺고 싶었는데, '돌격대'로 뽑혔다며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끌려왔다고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8028|전했다.]]] 정권의 입맛에 맞게 편향적으로 경영을 하여 [[1990년 KBS 사태|총파업]]을 유발시켰고, 1991년에는 기존에 편성된 <집중기획-바나나 비상> 대신 다큐멘터리 영화 <지구 최후의 황제, 김일성>을 긴급편성해 [[http://m.kbsunion.net/news/articleView.html?idxno=772|논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임기 내내 노사관계에서 충돌을 자주 겪은 탓에 별 다른 특징이나 선호 프로그램을 남기지 못한 채 1993년에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홍두표]]에게 자리를 넘겼다. 그 외에도 1991년 아시아신문재단 한국위원장을 비롯해 서암학술장학재단 이사장(1992~1999), 한국낚시진흥회 회장(1993~2001), '96 문학의 해 조직위원장(1995~1996), [[공연예술진흥협의회]] 위원장(1997~1999)을 각각 역임하였다. 2005년 7월 30일 오후 3시 25분에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유족으로는 부인과 3남 1녀가 있다. 여담으로 동명이인의 1937년생 아나운서가 있었으며, [[동양방송]](RSB 라디오 서울 포함)을 시작으로 [[한국방송공사]]에서 아나운서로 재직했다. [[분류:1930년 출생]][[분류:2005년 사망]][[분류:대구 서씨]][[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6.25 전쟁/군인]] [[분류:경복고등학교 출신]] [[분류:서울대학교 출신]] [[분류:한국방송공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