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명사)] ||||<tablealign=right> [[파일:attachment/서광계~1.jpg|width=300]] || |||| '''徐光啓''' || || '''출생''' ||<(> [[1562년]] || || '''출생지''' ||<(> [[명나라]] 상하이 || || '''사망''' ||<(> [[1633년]] || || '''종교''' ||<(> '''[[가톨릭]]'''(세례명: 바오로[* 중국어 음차 표기로는 保禄이다.]) || || '''사망지''' ||<(> [[명나라]] 베이징 || [[파일:attachment/Xu_Guangqi_Memorial_Hall.jpg|width=300]] 넓은 세상을 본 [[중국]] [[명나라]]의 관리. 자는 자선(子先). 세례명은 바오로. 군사/문화/종교/서양학 모두에서 활약한 인물로 [[16세기]]말~[[17세기]]초 당대의 명나라의 엘리트 중에선 거의 먼치킨급이었던 [[이지조]], 양정균과 콤비를 이루었다. [[1600년]] [[마테오 리치]]에게서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 천문학 등 각종 서적을 번역하였다. 기하원본, 측량법의, 측량이동, 구고의등을 번역하고 역법을 배웠다.[* 이 과정에서 기존 중국 별자리 체계에 남반구 별자리 23개를 새로 추가하기도 했다. 또한, geometry를 지허(機何)로 음차해 '기하'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이 바로 서광계이다.] 천주교 사상을 통해 중국 유학을 보충하고 불교를 바꿀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상을 전개 하였다. [[1616년]] [[남경교안]] 당시 이를 막기위해 상소를 올리기도 하여서 교안을 막지는 못했지만, 연기시키고 천주교의 맥을 잇는데는 성공하게 된다. 또한 [[홍이포]]의 위력을 알아보고서 홍이포를 [[네덜란드]]로부터 수입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과의 인맥을 이용하여 [[마카오]]를 통해 30문의 홍이포를 수입해온다. 그 중 11문은 [[산해관]]에 설치하였고, 나머지는 수도인 [[북경]]성에 설치. [[원숭환]]은 이후 [[영원성 전투]]에서 이 홍이포를 이용하여 후금군을 박살냈다. 앞서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은 작전 미스, 기후 불안 등의 2중3중 악재가 겹쳐 철저히 개발살났다. 이를 계기로 서광계는 국방 체계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천계제]]의 총애를 받는 [[위충현]]이 까는 바람에 관직을 집어치웠다. 그런데 영원성에서 단 11문의 홍이포가 활약하며 승리하자 홍이포의 위력이 명과 후금 전체에 알려지면서, 이후 [[숭정제]]가 즉위하고서 명은 홍이포의 대량 생산에 들어가는데 그 담당자를 맡는다. 이렇게 아담 샬의 도움을 받아 서광계가 첫 해에만 찍어낸 홍이포의 숫자가 '''무려 400문.'''[* 비슷한 시기 지방정부에서도 홍이포를 생산하였는데 양광총독부에서만 무려 500문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사스가 원조 천조국-- 2차로 150문을 더 제작하여 성에 배치하고, 함선에도 배치한다. 그 외에도 상하이에 각종 복지 시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화포랑 복지 시설을 찍어내다가 [[1633년]]에 --[[멸망한 나라|다행히 더러운 꼴 안보고]]-- 71세의 나이로 선종한다.[* 당시 명나라는 1627년에 바로 이자성의 난(초기시점)이 시작되었고 이 당시 기후적인 문제로 기근과 흉작이 계속 지속되었고 이것은 전 중국으로 휩쓴다. 또한 명청전쟁으로 급증한 군사비 재원을 충당하기위해 3향과 같은 부가세들을 더욱 걷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또 후금은 내몽골을 통해 우회하여 중국 북부지역에 주기적으로 침공해서 엄청난 약탈을 감행했었다. 서광계가 선종할 당시 망국의 조짐들이 곳곳에서 본격적으로 터지고 있을 때였다.] [[아담 샬]]을 명나라 조정에 천거해 흠천감 관직을 맡겼다. 후일 아담 샬은 청나라 때에도 계속 활동한다. 상하이 시의 한 구역 쉬자후이(徐家匯)는 그의 집안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쉬후이 구(徐匯區)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본인도 천주교인으로 유명했지만, 그의 손녀 캔디다도 유명했는데, 남편을 신자로 만든건 물론 전국 선교사마다 금 200냥씩을 나누어주고, 교당 수십여채를 지으며 130여권의 종교서적을 인쇄하는데 돈을 대기도 하며 수주등지에서 부유한 상인들과 공동으로 아동입양사업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1670년 명대 과학자 서광계와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기하학 원론> 1~6권을 함께 번역하여 <기하원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서광계는 <기하원본>을 극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네 가지가 불필요하다. 첫째 의심, 둘째 추측, 셋째 검증, 넷째 수정이다. >또한 이 책은 네 가지가 불가능하다. 첫째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고, 둘째 반박할 수 도 없으며, 셋째 줄일 수도 없고, 넷째 앞뒤에 덧붙일 수도 없다. 서광계는 <기하학원론>을 완역하고자 했지만 마테오 리치가 1610년에 선종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언제 누가 대업을 이어갈 수 있을지 기다릴 뿐이다, 라고 썼다. ([수학의 역사], 지즈강 지음/ 권수철 옮김/ 더 숲,2015 8쇄판) [[분류:명나라의 인물]][[분류:1562년 출생]][[분류:1633년 사망]][[분류:중국의 가톨릭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