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align="center"><tablewidth=350><:> [[파일:생 시몽 백작.jpg|width=100%]]|| ||<width=25%><:>'''풀네임''' || '''Comte de Saint-Simon, Claude Henri de Rouvroy''' (클로드 앙리 드 루브루아, 생 시몽 백작) || ||<:>'''생몰년''' ||<:>[[1760년]] ~ [[1825년]]|| [목차] == 개요 == 생 시몽은 [[7월 왕정]]과 [[프랑스 제2공화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백과사전 작가이다. 샤를르 푸리에의 푸리에리즘과 함께 공상적 사회주의의 두 분파 중 하나 생 시모니즘의 창시자이다. == 인생 == 1760년 파리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다. 계몽주의에 깊이 심취해, 17살 때부터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라파예트]] 곁에서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한다. 1783년 프랑스에 돌아와서 네덜란드, 스페인을 포함한 유럽 각지를 여행했고, 여기서 습득한 경험과 지식으로, [[프랑스 혁명]]에 참여한다. 생 시몽은 자유주의의 지지자였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제국]] 때와 [[루이 18세]] 때도 자유주의 사상가로써 활동했으나, 소수의 부르주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자유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노동자 위주의 사회를 꿈꾸게 된다. 그에게 프랑스 혁명은 단순한 정치적인 혁명이 아닌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한 혁명이었다. 1805년부터 생 시몽은 재정난에 시달렸고, 이는 그의 노동자 친화적인 사상의 발달에 일조하게 된다. 이는 그는 정치를 그만두고 저술 활동에 전념했고, "새로운 기독교 -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대화"(Nouveau christianisme - Dialogues entre un conservateur et un novateur) 1825년 죽기 직전에 출판한다.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 삶은 단 하나의 생각으로 정리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 사상: 생 시모니즘 == 그의 유언에서 볼 수 있 듯이 생 시모니즘은 실력본위주의를 설교했다. 그에게 지도자는 단순히 올바른 정치적 결정과 국민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고, 이런 역할에 가장 적합한 직업군은 과학자, 지식인, 엔지니어들일 거라 생각했다. 그는 [[리슐리외]]추기경이 1635년에 설립한 아카데미 프랑세즈로 대표되는 앙시앵 레짐이 지식을 국민을 위해 사용하는게 아니라 오직 시스템을 존속시키기 위한 제도로 보았다. 생 시몽은 [[아이작 뉴턴]]을 존경했고, 그와 같은 엘리트가 인류의 대표로,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그 덕분에 [[오귀스트 콩트]]를 포함한 [[에꼴 폴리테크니크]] 출신 엔지니어들의 지지를 받는다. 생 시몽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새로운 사회의 경제적인 모델을 제안하지 않았으나, 그의 제자들은 엘리트가 감독하나 노동자/농민들의 삶의 수준을 개선하는 계획 경제를 옹호한다. 천주교의 교리를 일부 계승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대가로 돈을 버는" 금융가들에 대한 혐오를 표출한다. [* 천주교 교리에 따르면 시간은 오직 신이 소유할 수 있었고, 원죄에 대한 징벌로 인간은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자들에게 금융업자들은 노동의 땀을 흘리지 않고도 돈을 버는 범법자들이었다.] 생 시몽은 금융가들에 대한 비판을 부르주와 계층으로 확장시켰고, 이들을 루이 16세 이전의 전제왕정제체인 앙시앙 레짐의 소산물로 보았다. 또 프랑스가 대부분 농업 국가였던만큼 농민들을 위한 사회주의를 설명하는데 큰 부분을 할당한다. 생 시모니즘은 19세기 프랑스를 휩쓸었으며, [[프랑스 제2공화국]]의 낙관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생 시몽과 생 시몽주의자들은 1824년 파리 정치 신문인 "글로브"(Globe)를 창설했고, 이상적인 사회를 갈급했던 프랑스 사회에 생 시모니즘을 빠르게 보편화시켰다. 글로브는 큰 파급력 가져 [[아돌프 티에르]], 프랑수와 기조, 로아예르 꼴라르 등 당대 정치 거물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 종교적인 색채 === 생 시몽의 사후 그를 계승한 제자들은 각자 분파를 설립했고, 그 중 바르텔레미 앙팡탕은 이를 기독교에 접목시킨다. 또 생 시몽의 죽음 이후 일종의 "사도"로, 사상의 전도자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생 시모니즘은 철학적 사상이나 경제/정치적 운동보다는 종교적인 색채를 띈다. 생 시몽의 저작물 중 하나 "제네바의 한 거주자가 동시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들"(Lettres d'un habitant de Genève à ses contemporains)에서 "신이 내가 말했다", 또 "나는 올바른 기독교적 정신을 민중과 왕들에게 포교하라는 신의 임무를 이행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생 시몽의 제자였던 [[오귀스트 콩트]]를 제외하고도, [[에밀 뒤르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프루동]]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 생 시모니즘 사상가들 == ||이름||생몰연도||비고|| ||[[오귀스트 콩트]]||1798년-1857년|||| ||바르텔레미 앙팡탕||1796년-1864년|||| ||필립 뷰세||1796년-1865년|||| ||삐에르 르루||1797년-1871년|||| ||미셸 슈발리에||1806년-1879년|||| [[분류:1760년 출생]] [[분류:1825년 사망]] [[분류:정치 사상가]] [[분류:프랑스 혁명 전쟁]] [[분류:일드프랑스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