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Wilm_Hosenfeld.jpg]] Wilhelm Adalbert Hosenfeld ([[1895년]] [[5월 2일]] ~ [[1952년]] [[8월 13일]]) [목차] ==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예비역]] [[육군]] [[보병]][[대위]]. [[폴란드]]의 무고한 사람들과 [[유대인]]들을 탈출시켜 준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영화)|피아니스트]]에서 스필만을 구해 준 그 독일군 [[장교]]이다. 스필만 뿐 아니라 다른 [[유대인]]과 폴란드 사람들을 도와 준 의인이다. 그는 전쟁 초반에는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호의적이었지만, 후에는 [[나치 독일]]에 실망하여 일기에 '국가사회주의 혁명은 모든 면에서 진지하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하늘이 노할 만한 죄인들이다' 라고 썼으며 슈필만을 만났을 때는 [[독일인]]이라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는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국이 다시 위대해질 수 있다고 믿은 것뿐 인륜을 저버리는 짓은 용서할 수 없다고 선을 긋는, [[욘 라베]]같은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 == 생애 == [[헤센]] 출신.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가톨릭]] 교사 집안에서 성장했고, 당시 불던 독일의 애국주의와 반더포겔 운동, 아내 안네마리[* 가톨릭 집안에 교사 아버지를 둔 호젠펠트와는 달리 개신교 집안에 보르프스베데(예술가촌) 출신 화가 아버지를 뒀다. 둘은 반더포겔 모임에서 만났다고 한다. 1920년에 결혼해 다섯 자녀를 두었다.]의 평화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제국]] [[독일 제국군|육군]] 장교로 참전하여 [[1917년]]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여느 사람들처럼 나치당에 가입했다. 호젠펠트는 초기에는 나치를 열렬히 지지했으나 갈수록 나치의 정책에 실망해갔다. 그는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가톨릭에 적대적인 태도 등을 비판했고, [[알프레트 로젠베르크|20세기의 신화]]를 깠다가 학교 위원회로부터 100% 국가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다시 예비역 소집으로 육군에 복귀했다. 소집 당시에는 병장이었고 이후 대위까지 진급하게 된다. 전투[[병과]]인 보병 [[위관급 장교]]였지만, 나이가 많은 예비역이었기에 일선 전투부대가 아닌 후방에서 장병들의 [[체육]] 관련 업무 등 행정직을 맡았다. 호젠펠트는 나치가 폴란드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들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폴란드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폴란드어]]를 배웠고, 금지된 행위임에도 [[성당]]을 찾아가 폴란드식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포로수용소를 짓는 임무를 맡은 동안엔 자기 직권을 남용하여 수감된 폴란드인들이 가족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하고 정해진 형기보다 일찍 내보냈으며, 체육관을 관리할 때는 박해받는 폴란드인과 유대인에게 위조 신분증을 주고 자기 사무실 내지 자기가 관리하는 [[체육관]]에 고용하는 방식으로 보호했다. 전쟁 끝무렵에는 유대계 폴란드인인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영화)|블라덱 슈필만]]을 발견하고 그가 살아남는 걸 도왔다. [[1945년]]에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25년형[* 이마저도 처음에는 사형(!)이었다가 사면된 것. 25년형을 때릴 때는 변호사도 없었다고 한다.]을 선고받고 심문을 당하다 [[고문]]후유증으로 추정되는 흉부대동맥 파열로 인해 1952년 사망했다. 수감생활 중 뇌졸중을 여러 번 겪는 바람에, 죽기 직전에는 지능이 7세 수준으로 퇴화되어 자기가 왜 고문당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구해준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이 그가 한 행동을 알려 탄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련]]은 독일군 [[포로]]들에게 자비가 없었고, 전쟁 초기에 수용소를 담당했고 바르샤바 봉기 이후 대리 정보 담당관으로써 포로를 심문해야 했던[* 이때 호젠펠트는 포로들에게 가해진 기혹행위를 비판하며 제네바 협약 준수를 주장했고, 전쟁포로의 지위를 부여해주려고도 했지만 결국 둘 다 실패로 돌아갔다.] 호젠펠트의 이력은 재판에 더 불리하게만 작용했다. 90년대 들어 호젠펠트가 구해준 사람들인 레온 바름과 블라덱 슈필만, 슈필만의 [[아들]]인 안제이 슈필만(Andrzej Szpilman) 등이 호젠펠트를 야드 바솀[* Yad Vashem. [[이스라엘]]에 위치한 [[홀로코스트]] 기념관이다.]의 세계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에 추가해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2009년]]에 추가되었다. 추가가 늦은 이유는 소련에서 때린 25년형 때문이었다고 한다. 억울했든 어쨌든 전범재판에서의 유죄판결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전쟁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는지 확인이 필요했다고. 세계의 의인에 추가되기 1년 전쯤 폴란드에서 두 번째로 높은 훈장인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메달을 받았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원작이기도 한 슈필만의 자서전[* 정확히는 재출간본. 재출간 후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었으며 현재 번역본은 절판된 상태다.]에는 그의 일기 일부가 수록되어 있으며, 호젠펠트의 편지와 일기를 묶은 책이 영어와 독어로 출간되어 있다. ||[include(틀:지도,장소=Wilm-Hosenfeld-Haus Raiffeisenstraße, Hünfeld 너비=100%,높이=225px)]|| 독일 중부의 [[헤센]] 주에 있는 [[풀다]](Fulda) 시의 [[휜펠트]](Hünfeld)라는 동네 출신으로 구글 지도에 그의 집이 나온다. 오늘날 독일의 거의 정 중앙에 있는 곳이다. 풀다 시에는 [[호젠펠트]](Hosenfeld)라는 마을도 있다. == 대중 매체 == 영화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영화)|피아니스트]] 후반부에 출연한다. 배우는 2차대전 독일군 전담 배우로 통하는 [[토마스 크레치만]]. 단 크레치만이 당시의 호젠펠트보단 많이 젊었다 보니 쨍쨍할 나이의 현역 같은 느낌이 난다. 영화에서 호젠펠트의 가족 사진은 실제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가족 사진을 참고해 최대한 비슷하게 찍은 것이다. 고증을 매우 잘한 사례다. [[분류:독일제국군/군인]] [[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 [[분류:독일 국방군/인물]] [[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 [[분류:독일의 가톨릭 신자]] [[분류:1895년 출생]] [[분류:1952년 사망]] [[분류: 헤센 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