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이탈리아인 교황]][[분류:1857년 출생]][[분류:1939년 사망]][[분류:롬바르디아 주 출신 인물]][[분류:성 베드로 대성당 안장자]] [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5><#806600> [[교황|[[파일:815px-Emblem_of_the_Papacy_SE.svg.pn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259_pio_XI.png|height=125]] || ||<width=30%> 제258대 [[베네딕토 15세]] ||<width=5%> → ||<width=30%><#806600> '''{{{#FFF 제259대 비오 11세}}}''' || → ||<width=30%> 제260대 [[비오 12세|가경자 비오 12세]] || ||||<table align=center><:> [[파일:external/goyaproduccioneses.files.wordpress.com/pio-xi.jpg|width=200]] || || '''교황명''' ||<(> 비오 11세 (Pius XI) || || '''본명''' ||<(> 아킬레 암브로조 다미아노 라티 [br] (Achille Ambrogio Damiano Ratti) || || '''출생지''' ||<(> [[오스트리아 제국]] 데시오 || || '''사망지''' ||<(> [[바티칸]] || || '''생몰년도''' ||<(> [[1857년]] [[5월 31일]] ~ [[1939년]] [[2월 10일]] (81세) || || '''재위기간''' ||<(> [[1922년]] [[2월 6일]] ~ [[1939년]] [[2월 10일]] (17년 4일) || || '''문장''' ||<:>[[파일:external/www.casadellescatole.org/PioXI.jpg|width=100]] || * [[라틴어]]: Pius PP. XI * [[이탈리아어]]: Papa Pio XI * [[영어]]: Pope Pius XI [[가톨릭]]의 제259대 [[교황]]. [목차] == 즉위 이전 == === 학구파 사제 === 1857년 5월 31일 [[밀라노]]에서 견직물 공장장의 아들로 태어난 비오 11세는 1879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철학, 신학, 교회법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로 지내며 고대 및 중세 교회 고문서 연구를 통해 고문서학자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 결과 밀라노 암브로시오 도서관을 거쳐 교황 [[비오 10세]]의 초청으로 바티칸 도서관으로 옮겨가 도서관장까지 역임하기에 이른다. 한편으로는 기존의 성직자들과는 달리 스포츠맨으로서 [[등산]] 애호가의 모습도 보이기도 했다. === 교황청 외교관 ===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비오 11세를 교황 순시관으로 임명해 [[폴란드]]로 파견했고, 얼마 후에 주폴란드 교황대사로 격상시켰다. [[1920년]] [[소련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바르샤바]]에서 급히 피신한 타국 외교관들과는 달리 폴란드에 남아 소련과 대화하려 했으나 불상사가 벌어질 것을 우려한 베네딕토 15세가 그의 소련행을 막았다. 비오 11세는 소련과의 접촉을 끊지 않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폴란드인들의 반감을 샀고, 오해를 풀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폴란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오 11세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자들과 한 편이 되었던 최초의 교황 특사 중 한 명이었고, 이는 냉전과 독재 시기의 성직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 재위기간 == === 교황선출 === [youtube(dpba6vg0w-Y)] * 비오 11세의 즉위식 동영상 1922년 1월 22일 베네딕토 15세가 선종한 후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콘클라베에서 1922년 2월 6일 총 14표를 획득하여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 파시즘, 나치즘에 얽힌 문제 ===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여 [[비오 9세]] 이래 반 세기 넘게 문제되었던 교황령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였으나 [[파시스트]]를 고발할 권리를 팔아 먹었다는 비판이 있었다. 영국의 신문 [[가디언]]이 2013년 1월 21일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http://www.guardian.co.uk/world/2013/jan/21/vatican-secret-property-empire-mussolini|바티칸은 어떻게 무솔리니의 수백만의 자금을 이용하여 비밀스러운 부동산 제국을 건설하였나?]] [[라테라노 조약]]의 대가로 [[무솔리니]]에게 현재 시가 5억 파운드에 달하는 현금을 지원받았다는 점이 확인되었으며, 당시 무솔리니에게 받은 돈은 조세포탈을 위한 역외지역에 설립된 지주회사를 통해 관리되었다는 점 역시 영국의 전시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비오 11세는 파시스트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견해를 취했던 사람이다. [[1931년]]에 발표한 회칙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Non Abbiamo Bisogno)》를 통해 비오 11세는 파시즘과 무솔리니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고, 이 때문에 교황은 선종할 때까지 무솔리니와 불편한 관계를 지속했다. 한편으로는 나치와도 실제로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는데 1937년 회칙 《깊은 근심과 함께(Mit Breender Sorge)》[* 전통적인 라틴어로 된 회칙이 아니라, [[독일어]]로 발행되어 모든 교구의 성당에서 낭독하게 했다.]을 발표해 나치즘을 신이교주의라 비판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모든 유혹에 저항하라고 되어 있다. 결국 바로 다음 날 친나치 신문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의 신을 신봉하는 자들'이라는 기사를 냈고 2년 후 비오 12세가 즉위하자 나치 기관지인 《다스 라이히》는 비오 11세와 비오 12세를 한데 묶어서 유대인 교황들이라고 폄하했다. 비오 11세의 주치의가 프란치스코 페타치인데, 공교롭게도 주치의의 딸인 [[클라라 페타치]]가 [[베니토 무솔리니]]와 내연관계였다. === 업적 === [[나치 독일]] 내 가톨릭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국종교협약]]을 맺었고 노동자 권익보호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레오 13세]]가 반포한 회칙 '[[새로운 사태]]' 40주년을 맞이하여 발표한 회칙 '[[40주년]]'은 노동 운동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나아갈 바에 대해 이정표를 제공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때 노동자들의 성인으로 여겨진 사람은 [[성모 마리아]]의 남편인 [[나자렛의 성 요셉]]이었다. 후임 교황 [[비오 12세]] 대에 이르러 [[노동절]]인 [[5월 1일]]이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지정된다. 또한 [[성심수녀회]] 창설자인 [[복자|복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를 [[성인#s-2|시성]]했다. '''[[한국]]의 [[순교자]] 79위를 [[복자|시복]]한 교황이기도 하다.''' 또한 [[전주교구]]와 [[광주대교구]]를 설정했다. [[파스칼리나 레네르트]]와도 인연이 있는 교황이다. 어느 날 비오 11세가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에 신학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파스칼리나 수녀가 당시 추기경이자 자신의 직속 상관이던 비오 12세를 통해 연설문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를 한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비오 11세는 문제의 연설문을 수정한 뒤 파스칼리나 수녀를 불러 크게 칭찬하면서 앞으로 비오 12세를 많이 도와주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 선종 == ||<table align=center>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0px-Pie_XI_D%C3%A9pouille.jpg|height=255]] || [[파일:external/images.fineartamerica.com/the-tomb-of-pope-pius-xi-joel-sartore.jpg|width=385]] || || 교황의 시신 ||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있는 비오 11세의 무덤 || [[1938년]] [[11월 25일]]에만 2차례나 심장마비를 겪은 교황은 급속도로 쇠약해졌으며, 결국 [[1939년]] [[2월 10일]] "내 영혼은 평온하게 여러분 곁을 떠납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