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이탈리아인 교황]][[분류:1854년 출생]][[분류:1922년 사망]][[분류:제노바 출신 인물]][[분류:성 베드로 대성당 안장자]] [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5><#806600> [[교황|[[파일:815px-Emblem_of_the_Papacy_SE.svg.pn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258_benedetto_XV.png|height=125]] || ||<width=30%> 제257대 [[비오 10세|성 비오 10세]] ||<width=5%> → ||<width=30%><#806600> '''{{{#FFF 제258대 베네딕토 15세}}}''' || → ||<width=30%> 제259대 [[비오 11세]] || ||||<tablealign=center> [[파일:external/skepticism-images.s3-website-us-east-1.amazonaws.com/Pope-Benedict-XV-1914-b.jpg|width=200]] || || '''교황명''' ||<(> 베네딕토 15세 (Benedictus XV) || || '''본명''' ||<(> 자코모 파올로 조반니 바티스타 델라 키에사[br](Giacomo Paolo Giovanni Battista della Chiesa) || || '''출생지''' ||<(> [[사르데냐 왕국]] [[제노바]] || || '''사망지''' ||<(> [[이탈리아 왕국]] [[로마]] || || '''생몰년도''' ||<(> [[1854년]] [[11월 21일]] ~ [[1922년]] [[1월 22일]] (67세) || || '''재위기간''' ||<(> [[1914년]] [[9월 3일]] ~ [[1922년]] [[1월 22일]] (7년 141일) || || '''문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80px-C_o_a_Benedictus_XV.svg.png|width=100]] || * [[라틴어]]: Benedictus PP. XV * [[이탈리아어]]: Papa Benedetto XV * [[영어]]: Pope Benedict XV [목차] [clearfix] == 어린 시절 == [[이탈리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부터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운동보다는 공부에 관심이 많았고 소싯적에 [[장난감]] 제대에서 사제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적잖은 [[성직자]] 중에는 어렸을 때 [[미사]] 놀이를 즐겨한 경우를 찾아 볼 수 있다. [[불교]]의 큰[[스님]]들도 어려서부터 싸움 놀이보다는 [[공양]] 드리고 [[절(불교)|절]] 세우는 놀이를 좋아했다지 않는가. --성직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구나--] == 교황 선출 ==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신부(종교)|신부]]가 되는 것을 반대했으나 아버지를 설득해 신학교에 입학, 1878년 사제 서품을 받고 [[신학]]과 교회법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07년에는 [[주교]] 서품을 받았는데, 당시 주례 사제가 그의 전임자였던 [[성 비오 10세]]였다. [[교황청]]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비오 10세]]가 [[뇌졸중]]으로 1914년 8월 선종하자 [[추기경]]에 오른지 얼마 안되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는 [[외교]]적인 능력이 뛰어난 교황을 원했는데, 베네딕토 15세는 이 조건에 꼭 맞는 적임자였다. 대관 미사는 [[시스티나 경당]]에서 간소하게 거행되었다. == 평화를 위한 노력 == 교황의 주된 관심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이었다. 그는 평화운동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베네딕토 15세의 평화운동에 대해 당시 [[프랑스]] 총리였던 [[조르주 클레망소]]는 [[독일]]놈의 교황이라는 욕을 퍼부었고 ~~프랑스 국익에 보탬이 돼주는데 왜?~~ 독일 측은 프랑스 교황이라며 욕했다고 한다. ~~독일 국익에 보탬이 돼주는데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토 15세는 여러 가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재위 중이었던 1917년 포르투갈에서 [[파티마의 성모]] 발현이 일어났다. 가톨릭측은 이를 베네딕토 15세가 기울인 평화 노력,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평가한다.[* 성모 마리아가 파티마에 처음 발현하기 5일 전인 1917년 5월 8일에 베네딕토 15세가 1차대전의 종식을 간구하는 기도를 성모에게 올린 바 있었다.] 또한 [[잔 다르크]]를 화형 489년 만이자 명예회복 464년 만인 [[1920년]] [[5월 16일]]에 [[시성식]]을 거행해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한편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한국 천주교]]의 자녀들이 받는 핍박을 우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밀서를 보냈다. 임정에 대한 교황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한국 천주교]]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일부 [[한국인]] [[신부(종교)|신부]]들은 [[일본제국 경찰]]에 의해 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바티칸]]은 14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그의 [[선종(가톨릭)|선종]] 이후엔 26개국으로 늘어났다. == 선종 == ||<table align=center> [[파일:external/www.cesnur.org/(2).jpg|width=400]]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omb_of_pope_Benedictus_XV.jpg|width=400]] || || 교황의 시신 ||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있는 베네딕토 15세의 무덤 || 베네딕토 15세는 [[1922년]] [[1월 22일]]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67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 기타 == 그 시기 [[바티칸]]은 재정 문제로 매우 큰 고생을 했다. 베네딕토 15세는 무리하게 [[오스만 제국]]의 국채에 투자했다 큰 손실을 보았다고 한다.[[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31118_0012523421&cID=11018&pID=11000|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