伯嚭 생몰년도 불명[* [[사기(역사책)|사기]](史記)의 기록을 따르면 기원전 485년에 죽었다고 볼 수 있다.] [목차] == 소개 == [[중국]] [[춘추시대]] [[오(춘추시대)|오(吳)나라]]의 대신. 조상은 원래 [[진(춘추오패)|진(晉)나라]] 공족이라 성이 희성(姬姓)이다. [[백종]](伯宗)의 증손자, [[백주리]](伯州犁)의 손자이자, 백극완(伯郤宛)의 아들. 달리 태재 비(太宰嚭)라고도 불린다. 증조부 백종은 너무 똑똑하다는 이유로 진(晉)나라에서 참소를 받자, 아들 백주리를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로 도피시켰다. 조부 백주리는 [[춘추좌씨전|좌전]]에 따르면 초나라에서 예교에 가장 능하고 안목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즉 신흥강국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중원과 거리가 멀던 초나라의 예법을 당시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인 것이다. == 생애 == === 오나라로 달아나다 === [[낭와]](囊瓦)가 극완을 죽이고 극완의 동성인 극씨, 백씨, 진씨를 몰살시킬때[* 모두 희성이다.] 겨우 살아남아 오나라로 망명했다. 이에 [[합려]]와 [[오자서]]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 이유는 [[합려]]는 중원의 예법을 아는 그가 필요했고, 오자서는 초나라에 원한을 가지고 칠 장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예 [[동병상련]] 고사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맞았을 정도니 백비의 위상을 능히 짐작할만하다.] 연구에 따르면 살아남은 백비의 일족이 망명한 것으로 본다.[* 백비는 오에서 태재(太宰)라는 직책을 맡게 되는데 오나라의 태재는 쉽게 말하면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직책, 즉 국가의 설계자로 법령과 전적(육령)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조선]]의 [[정도전]]의 역할+@라고 보면 된다. 즉 이러한 일은 젊은 백비 개인이 맡았다기 보다는 전문집단이 맡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자세한 내막은 [[비무기]](費無忌)가 좌윤을 지낸 극완을 꺼려 영윤 낭와에게 그를 모함해 극완을 죽이고 그 일족을 대부분 멸했다. 유일하게 백비네 족인들이 오나라로 달아났고 오자서는 그를 안타깝게 여기며 맞이했다. 오의 대부 피리가 그를 맞아들이지 말라고 했으나 오자서는 [[동병상련]] 고사를 만들면서까지 맞아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월나라의 일로 두 사람의 사이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갈라졌다.] === 초나라를 멸망시키는 일에 참여하다 === 기원전 506년, 오왕 [[합려]]는 오자서, 백비가 초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자고 하니 합려는 준비가 충분하다고 여기고 초나라의 수도인 영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러나 동생 부개의 난과 초나라 사람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결국 1년 뒤 초나라에서 몸을 뺐다. 기원전 496년, 오왕 합려가 월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입은 상처로 인해 죽자 [[부차]]는 백비를 태재로 임명했다. === 오자서와 사이가 벌어지다 === 기원전 494년, 오왕 부차는 오자서를 대장으로 백비를 부장으로 해 월나라를 쳤다. 그리고 월왕 [[구천]]은 대부 문종의 말을 듣고 회계산에서 항복했다. 그리고 문종이 백비의 욕심과 오왕의 총애를 들어 부차를 설득시켰고, 구천은 부차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당연히 오자서는 선왕의 유언을 잊지 말고 구천을 죽이라고 했으나 백비는 부차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으므로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기원전 485년, 그는 끝내 오자서를 모함을 해서 그를 해쳤다. 기원전 473년, 오나라가 망하자 월왕 구천은 그를 등용했다고 한다.([[좌전]], [[춘추]]의 기록.) 반면 사마천의 [[사기(역사책)|사기]](史記)에서는 이용가치가 떨어진 백비를 처형했다고 나온다. 춘추시대의 역사서 중 가장 권위있는 [[좌전]]에 따르면 오나라가 망한 후에도 기술관료로서의 이용가치가 높아 월나라의 태제를 계속 지냈다고 한다. 아무래도 동시대의 좌전, 춘추가 수백 년이 지난 후에 쓰여진 사기보다 더 신뢰성이 높아 보인다. 소설 열국지에서는 전형적인 간신배로 등장한다. [각주] [[분류:춘추전국시대의 공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