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鵬濟 1910년 ~ ? 친일 관료, 변호사. 본관은 [[수원 백씨|수원]](水原).[* 인주공파(仁州公派) 26세손 ◯제(濟) 항렬] [[백인제]]의 동생, [[백낙청]]의 아버지다. 1910년 [[평안북도]] [[정주군]] 남서면 남양동[* [[수원 백씨]] 집성촌이다.][[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224979|#]]에서 태어났다. 일본 마쓰야마(松山) [[구제고등학교|고등학교]][* 이 당시 고등학교는 대학 예과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구제고등학교]] 참조. 마쓰야마 고등학교는 현재 [[에히메대학]]의 전신이다.]와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및 행정과 양과에 합격했다.[* 지금으로 치면 [[사법시험]]과 [[행정고시]]에 모두 합격한 것에 해당된다.] [[경상북도]] 내무부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여 군수를 거쳐 이사관으로 승진했다. 해방 당시 35세의 나이에 [[전라남도]] 내무부 사회 과장까지 승진했다. [[일제강점기]] 관료로 재직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군수품 공출, 국방 헌금 모금 등 전시 업무를 수행하여 '지나 사변 공적 조서'에 이름을 올렸다. 이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관료 부문에 수록되었다.[* 과거 편집에 자작 작위를 받았다는 서술이 있는데, 친일파 708인 명단 - 조선귀족명단 및 친일인명사전 수작/습작 명단에 수작했다는 기록이나 근거가 없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 물려받은 경우(습작)를 제외하고 새로 수작한 이는 이항구가 유일한데 그는 [[이완용]]의 아들(!)이며 작위도 가장 낮은 남작이다. 일개 관료가 군수지원 업무로 대대손손 세습되는 귀족 작위를 받는 일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다. 자세한 것은 [[조선귀족]] 문서를 참조할 것.]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경기도]] 재무 부장에 임명되어 재직하다 변호사로 활동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형 [[백인제]]와 함께 납북되어 이후 행적은 미상(未詳)이다. 가족들에 증언에 따르면 형 [[백인제]] 박사가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올 때 피신했다가 잡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가겠다"고 하여 7월 19일에 집에 잠시 들렀는데, 그때 북한군이 집에 숨어 있던 백붕제를 발견하고 형제를 같이 끌고 간 것이라고 한다. 15세에 안숙온(당시 18세)과 혼인하였으나 2년 뒤 안숙온은 장남을 낳고 6개월만에 병사하였다. 후에 일본 [[나라여자대학|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최귀란과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백낙환]]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백부 백인제의 의업을 이어 받아[* 생후 6개월에 친모가 사망할 당시 아버지 백붕제는 17세에 불과했다. 할아버지가 맡아서 키우다가 이후 백부 백인제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인제대학교]]를 설립하고 인제 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차남은 [[백낙청]]이다. 4남 백낙서는 미국 [[윌리엄스 대학교]]를 나와 [[통일부|통일원]] 기획 관리 실장과 인제대 교수를 지냈다. 3녀 백미영은 서울대 음대를 나온 피아니스트로 [[단국대]] 교수를 지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백낙청, version=76)]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관료]][[분류:정주시 출신 인물]][[분류:납북자]][[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1910년 출생]][[분류:수원 백씨]][[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분류:교토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