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bgcolor=#878787> '''{{{#FFFFFF {{{+1 백년설[br]白年雪}}}}}}''' || ||<-2><tablealign=right><tablewidth=500><tablebordercolor=#878787><tablebgcolor=#fff,#191919>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가수백년설.jpg|width=100%]]}}} || ||<width=23%><colbgcolor=#878787><colcolor=#fff> '''본명''' ||이갑룡 (李甲龍) → 이창민 (李昌民) || || '''본관''' ||[[성주 이씨]] || ||<|2> '''출생''' ||[[1914년]] [[5월 19일]] || ||[[경상북도]] [[성주군]] || ||<|2> '''사망''' ||[[1980년]] [[12월 6일]] (향년 66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가족''' ||배우자 [[심연옥]][* 아내의 노래 등을 부른 가수이다.] || || '''종교''' ||[[불교]] → [[여호와의 증인]] || || '''데뷔''' ||[[1938년]] '유랑극단' 입단 || || '''경력''' ||콜럼비아레코드사 전속작사가[br]태평양레코드사 전속가수[br]가수협회 회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던 [[가수]]. 본명은 원래 이갑룡(李甲龍)이었지만, 늘 이창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 결국 1964년에 정식으로 개명했다. 1950년대에 작사가로 활동할 때엔 향노(鄕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8.15 광복]] 이전의 작품이 현재 80여 곡 가량 확인되고 있다. [[남인수]]와 같은 시대에 인기를 누렸다. == 생애 == 1914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성주 [[성밖숲]]과 [[성주고등학교]]에 백년설 노래비가 있다.] 1922년 성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8년에 졸업했다. 1929년 성주농업보통학교(現 [[성주고등학교]])에 입학해 1931년에 졸업했다. 이후 경성으로 가서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은행과 신문사에서 잠시 근무했다고 한다. [[1938년]]에 시험삼아 녹음한 <유랑극단>이 다음해에 발매되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가수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1941년]]까지 태평 레코오드사 전속으로 있으면서 <두견화 사랑>, <눈물의 수박등>, <복지 만리>, <대지의 항구>, <일자 일루>, <나그네 설움> 등을 불러 당대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8.15 광복]] 이후에는 가수로 활동하는 것보다 사업체 운영과 [[고아원]] 운영에 몰두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다시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가수 활동이 부진했다. 1963년 7월에 은퇴공연을 하며 공식적으로 가수 생활을 끝냈다.[* 은퇴공연 이후 1973년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부탁해서 <백년설 독집>을 냈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지사장을 맡았다. 1970년 이후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1978년,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80년 12월 6일에 타계했다. 2002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다. == [[일제강점기]] 활동 == 백년설은 1941년 [[태평양 전쟁]]에 지원병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노래를 불렀다.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 백년설이 몸담은 오케레코드도 비록 설립자인 이철이 친일파 인맥으로 큰 것은 사실이나 그 역사를 보면, 일본인 앞에선 '을'의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백년설이 친일 가요를 녹음했을 때는 이철이 권한을 잃고 일본인의 간섭이 심해졌던 시기다. 따라서 소속 가수들은 '을도' 못되는 '병', '정'이었을 것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98868&cid=4491&categoryId=4491|#]] 그런 점에서 백년설 같은 당시 가수들의 친일 행적을 야마구치 요시코(중국명 리샹란)[* [[중국인]]으로 위장해 [[군국주의]] 선전 활동을 펼친 [[일본인]] 여가수. [[히키아게샤]].]가 했던 그것과 같다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전두환|29만 원님]] 시절에 '아 대한민국' 같은 관제 가요를 부른 [[정수라]] 같은 가수의 사례와 비슷하다 보아야 할지, 혹은 일종의 [[강제징용]]이거나 [[북한]] 김씨 왕조 치하 연예인의 경우와 유사하다 볼 수 있는지는 좀 더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 여담 == 가수 배금성이 백년설의 외손자이다.[[https://www.asiae.co.kr/article/2008032609455543023|#]][* 다만 심연옥의 친외손자는 아니다. 심연옥과는 41살이나 차이나니 나이상으로는 외할머니가 될 수 있지만 백년설이 1957년에 심연옥과 재혼을 했기 때문. 아마 배금성은 병으로 작고한 백년설의 전처의 딸 소생인 듯 하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32세에 가수로 데뷔해 지금까지 활발히 활동 중. [[가요무대]] 라인업에 자주 들어간다. 야인시대 패러디로 자주 사용되는 심영의 장면 중 중앙극장 앞에서 학생들이 "정말 위대합니다 선생!"을 외치는 장면에 나오는 배경음악이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1940)이라는 곡이다. == 발표한 곡 == * 나그네 설움 * 번지 없는 주막 * 알성급제 * 복지만리 * 대지의 항구 * 눈물의 수박등 * 고향설 * 산 팔자 물 팔자 * 만포선 길손(만포진 길손, 황지선 길손이라고 하기도 한다.) * 삼각산 손님 * 일자일루 * 눈물의 수박등 * 알성급제 * 비오는 해관 * 남포불 역사 * 산팔자 물팔자 * 두견화 사랑 * 경기 나그네 * 어머님 사랑 * 비오는 해안 * 아주까리 수첩 * 마도로스 수기 * 유랑극단 * 제3 유랑극단 * 마도로스 박 * 춘소화월 * 천리정처 [[분류:성주 이씨]][[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문화, 예술]][[분류:한국 남가수/ㅂ]][[분류:트로트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ㅂ]][[분류:1914년 출생]][[분류:1980년 사망]][[분류:1938년 데뷔]][[분류:성주군 출신 인물]][[분류:보관문화훈장]][[분류:여호와의 증인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