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rd1=박희도(축구선수), other2=친일반민족행위자, rd2=박희도(1889))] [include(틀:12.12 군사반란 가담자)] ||<tablewidth=100%><#f00><tablebordercolor=#f00> {{{#FFF '''역임한 직위'''}}} ||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대한민국 역대 육군참모총장)] [include(틀:제3야전군사령관)] [include(틀:대한민국 역대 육군참모차장)] [include(틀:제1군단장)] [include(틀:육군특수전사령관)] }}} || ||<-2><tablebordercolor=#f00><tablewidth=400><tablealign=right><tablebgcolor=#fff,#191919>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00, #f00 20%, #f00 80%, #d00)"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fff 대한민국 제26대 육군참모총장}}}]][br]{{{#fff {{{+1 박희도}}}[br]朴熙道}}}'''}}}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mp044028.jpg|width=100%]]}}} || ||<|2><colbgcolor=#dd0000><width=25%> {{{#ffffff '''출생'''}}} ||1934년 7월 22일 ([age(1934-07-22)]세) || ||[[경상남도]] [[창녕군]] || || {{{#ffffff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ffffff '''기간'''}}} ||<(>1956년 ~ 1988년 || || {{{#ffffff '''임관'''}}} ||<(> 육사 12기 || || {{{#ffffff '''최종계급'''}}} ||<(> 대장 || || {{{#ffffff '''최종보직'''}}} ||<(>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 || || {{{#ffffff '''주요보직'''}}} ||<(> [[주한 미8군 한국군지원단]]장[br][[제26기계화보병사단]]장[br][[육군특수전사령관]][br][[제3야전군사령관]] || [목차] [clearfix] == 소개 ==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 종교인([[불교]]), [[내란죄|내란사범]].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密陽). 군부의 실세로 박정희 인사로 대입하면 막강한 정치 군인 [[윤필용]]과 비슷한데 정작 윤필용과 같은 말로를 맞은건 [[박세직]]이였지만 박세직은 말실수로 숙청당한건 비슷하지만 권력과 신임은 박희도의 네임드나 권력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 일생 == 1934년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거남리[[https://m.blog.naver.com/baksj15/40186979029|#]]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같은 [[하나회]] 장성들인 [[노태우]], [[김복동(1933)|김복동]], [[이종구(군인)|이종구]] 같은 인물들과 학맥으로 엮이기도 했다. 1956년 3월 [[육군사관학교]] 제12기로 육군 [[소위]]에 임관했다. 한 기수 [[선배]]인 [[전두환]]과는 생도 시절부터 깊은 친분을 쌓아온 사이로 전두환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1960년대 중반에 하나회에 가입했으며 [[대령]] 시절 [[주한 미8군 한국군지원단]]장을 역임했다. 1975년 [[준장]]에 진급하자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관의 추천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에 부임했다. 사실 박희도가 준장에 진급한 것도 정병주 [[장군]]이 진급 심사에서 박희도를 준장으로 진급시키는데 크게 도움을 줬기에 가능한 것이였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하자 [[박정희]]는 이 사건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는데 [[노재현]] 당시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합동참모본부]]장에게 시켜서 박희도를 몰래 만난 뒤 보복 작전을 지시했다. 작전 명령은 [[판문점]] 뒤에 있는 [[북한]]의 [[불법]] 초소 4개를 완파하는 내용이였다. 이에 박희도는 [[김종헌]] [[소령]]을 특공대장으로 임명한 64명의 특공대원을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1여단에서 차출해서 [[권총]]과는 별개로 개인화기를 지참시켰다. 이에 [[주한미군]] 겸 유엔군사령부[* 해당 사건 당시는 [[한미연합사]] 창설 전으로 주한미군 사령관은 유엔군사령관 자격으로 [[한국군]]과 주한미군에 대한 총괄 작전권을 행사했다.] [[사령관]]인 리처드 스틸웰 [[미 육군]] 대장이 이에 분노하여 박희도를 몰아세웠다. 그러자 박희도는 오히려 성질을 내며 "이보시오, 지금 이게 [[스포츠]]인 줄 아시오? 제대로 갖춘 개인화기도 없이 [[부하]]들을 사지에 보낼 수는 없오"라며 리처드 스틸웰 대장에게 반박하고 당초 계획대로 개인화기를 지참하고 작전을 실행했다. [[미국]] 측에서 대단히 분노하여 박희도를 [[보직해임]]시킬 것을 강요했으나 박정희는 미국 측을 잘 달래서 사건을 무마시켰다. 사실 먼저 쳐들어온 쪽이 북한이었고 작전 지시를 내린 사람이 박정희이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 않게 무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의 비호를 받은 바 있는 박희도는 이번에는 진짜 위기가 찾아왔다. 1978년 북한에서는 무장공비를 파견하여 [[서산시|서산]] 앞바다에서 군사 기밀을 캐가고 제1공수특전여단의 위수 지역을 마음껏 돌아다닌 뒤 [[임진강]]을 건너 복귀하는데에 성공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인하여 박희도는 당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인 [[이세호]] 대장에게 격렬하게 문책을 받았고 쪼인트를 까이는 등 말이 아니였다. 이세호는 머리 끝까지 빡쳐서 박희도의 [[군복]]을 벗겨버리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이때 또다시 정병주가 나서서 이세호에게 그래도 박정희가 특별히 지시한 작전을 완수한 지휘관이고 하니 1번만 용서해달라고 진짜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다 버리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이 정도로 박희도를 정병주가 보호해줘서 겨우 군생활의 위기를 넘겼지만 1년 후 박희도는 [[12.12 군사반란]]에 참여함으로써 자기의 은인인 정병주를 [[배신]]했다. 그의 인생을 총평하자면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세상 누구에게라도 기꺼이 [[충성]]하는 소인으로 유취만년(遺臭萬年)이란 이런 자에게 어울리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일:hnh.jpg]] 하나회에서 박희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12.12 군사반란이 성공하고 군 수뇌부 인사가 발표된 뒤인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다.]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에서는 노태우 바로 옆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5> [[대한민국 육군]]의 [[제3야전군사령관]] || || 7대 [[정호용]] || → || 8대 박희도 || → || 9대 [[최세창]] || ||<-5> [[대한민국 육군]]의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참모총장]] || || 25대 [[정호용]] || → || 26대 박희도 || → || 27대 [[이종구(군인)|이종구]] || 1979년 12월 12일 제1공수특전여단장(준장) 신분으로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해 반란의 1등 [[공신]]이 되었다. 직속 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지시에 항명하고 박희도는 병력을 동원하여 총격전[* 제대 2개월을 남기고 있던 국방부 헌병대 정선엽 [[병장]], 신원 불명의 국방부 옥상 발칸 운용병이 총격전에서 [[사망]]했다. 정말 애꿎은 죽음을 맞은 이들은 12.12 군사반란의 진짜 피해자들로도 언급받지 않고 잊혀져버렸다.]을 벌이고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와 [[육군본부]]를 불법적으로 점거하였다. 숨어있던 [[국방장관]] 노재현도 확보하는데 성공하여 [[대통령]] 재가를 받아낼 수 있게 되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최세창]]의 3공수여단에 체포되어 진압군은 결국 무력화되고 만다. 박희도는 이 공로로 1979년 [[육군]] [[소장(계급)|소장]]으로 진급하여 [[제26기계화보병사단]]장에 부임했다. 이후 1년도 안되어 [[중장]]으로 진급하여 하나회 선배 [[정호용]]의 후임으로 특전사령관에 부임했다.[* 사령관 재임 중 [[제주 C-123 추락사고]]가 발생하여 휘하 특전사 장병 53명이 희생되었으며 강제로 특전사 장병의 [[월급]]을 각출하여 자기 명의의 추모비를 세웠다. 정작 본인은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안난다고 발뺌하고 있다.] 하나회 12기 멤버였던 특전사령관 박희도, 보안사령관 [[박준병]], 수도경비사령관 [[박세직]]은 '쓰리 박'으로 불리며 무소불위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박희도는 12.12 군사반란 이전까지만 해도 육군사관학교 12기 선두 주자인 박준병, 박세직보다 진급이 1년 늦었지만 박세직이 일명 '박세직 사건'[* 박세직이 [[2인자]] 및 후계자를 자처했다는 이유로 전두환의 진노를 사서 예편당한 사건.]으로 소장 [[계급]]에서 예편당하고 박준병이 1984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차출되어 전역[* 정치권 차출 목적 외에도 충복 박희도를 육군참모총장으로 고려한 전두환의 염두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하면서 1985년 박희도가 육군참모총장에 오르게 된다. 육군참모총장 시절 1986년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는데 2년 임기가 만료되었던 1987년 12월에 예편 수순을 밟아야 했으나 전두환에 의해 임기가 1년 연장되었다. 이는 노태우에게 [[정권]] 이임을 눈 앞에 두고 있던 전두환이 자신의 영향력을 지속시키고자 자신의 직계인 박희도를 유임시킨 것이다.[* 이 외에도 3군사령관에 [[고명승]], 기무사령관에 [[최평욱]], 수경사령관에 [[김진영(군인)|김진영]]을 임명하며 노골적으로 자신이 [[상왕]]으로 군림하려 하는 태도를 내비쳤는데 노태우는 분노했다.] 이에 분노했지만 일단은 내색하지 않았던 노태우는 취임 이후 즉각 보복 인사를 행한다. 국민 [[여론]]을 명분으로 전두환 직계를 [[숙청]]하기 시작한 노태우에 의해 1988년 6월 임기를 6개월 앞두고 보직해임되어 [[전역]]했다. 전역 이후에도 다른 하나회 인사들처럼 공직이나 정계로 진출하지 못했다. 2차례 총선 출마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1992년 [[14대 총선]]은 [[공천]]이 거의 유력했다가 탈락했고 다음은 1996년 [[15대 총선]]인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사건]] 때문에 좌절되었다. 1994년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12.12 군사반란에 대한 혐의로 인하여 [[징역]]을 살다가 [[석방]]되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상임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주 독실한 불자라고 한다.] 2014년 11월 28일 '서북청년단 재건 총회'에서 [[서북청년단]]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2014년 12월 대한민국불교도총연합 상임고문 자격으로 [[통합진보당]] 해산 촉구를 주도했다. [[https://youtu.be/47fpa2Rgn30|2017년 박근혜 탄핵 반대 시위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 대중매체에서 == * 1995년작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드라마)|코리아게이트]]에서는 배우 [[서상철]]이 연기했다. [[파일:ParkHD-K.jpg]] (코리아게이트의 박희도) * 1996년작 [[MBC]] 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기정수]]가 연기했다. * 2005년작 MBC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전인택]]이 연기했다.[* 제40회에서는 잠시 다른 연기자가 연기했었다.] [[분류: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분류:육군특수전사령관]][[분류:밀양 박씨]][[분류:1934년 출생]][[분류:창녕군 출신 인물]] [[분류:경북고등학교 출신]][[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전두환 정부/인사]][[분류:대한민국의 반란자]][[분류:하나회]][[분류: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