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12.12 군사반란 가담자)] [include(틀:5.18 민주화운동)] [include(틀:국군기무사령관, 명칭=국군보안사령관)] [[파일:attachment/국군기무사령부/사령관/박준병.jpg]] 朴俊炳 [[1933년]] [[6월 21일]] ~ [[2016년]] [[7월 3일]] (향년 83세)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전 [[군인]](예비역 대장), [[정치인]]이다. 본관은 [[박(성씨)|태안]](泰安)[* 22세손. 전 국회의원 [[박유재]]는 조카뻘이다.], 호는 청산(靑山). == 생애 == 1933년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 인근의 신매리와 함께 [[박(성씨)|태안 박씨]] 집성촌이다. 전 국회의원 [[박유재]]도 이 마을 출신이다.][[http://www.ok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9440|#]]에서 태어났다. '청산'이라는 호가 바로 태어난 곳의 지명을 딴 것. [[육군사관학교]]를 12기로 졸업했으며 [[하나회]][* 본인은 하나회의 멤버가 아니라고 부인했고, [[전두환]]도 법정에서 박준병은 하나회의 멤버가 아니라고 말한바 있지만 증언의 신빙성이 모호한만큼 여전히 하나회 핵심 멤버 중 한 명으로 꼽힌다.]의 멤버로 동기 [[박희도]], [[박세직]]과 '3박'으로 불렸다. [[박세직]]과 더불어 동기 중 선두 주자였으며[* 당시 박희도는 박세직, 박준병보다 진급이 1년 늦는 후발 주자였다.], [[대령]]시절 [[제81보병여단|81보병연대장]]을 역임. 1979년 소장 진급 후 수도권 충정부대를 지휘하는 요직인 [[제20기계화보병사단|제20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재임 중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고 당시 경복궁에 모였던 가담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다만, 본인은 사전에 모임의 목적이 반란인지 모르고 갔었다고 말했다. 당시 전두환은 사전에 노태우, 황영시 등 반란군 멤버 중에서도 핵심 멤버에게만 계획을 알려주었다고 하니 사실일 가능성은 있다. 본인은 전두환의 20사단을 서울로 출동시키라는 지시를 거부한 점을 들어 쿠데타에 크게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나, 전두환이 [[정승화]] 참모총장 강제 연행 사실을 밝힌 이후에도 사건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계속 지켰으니 반란에 가담한 것은 빼박이다. 훗날,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와 [[육군본부]] 장악을 위한 [[전두환]] 병력 요청 동원은 거부한 덕에 12·12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중에 진압군으로 투입된 20사단을 지휘해 항쟁을 무참히 짓밟은 전과가 있다. 이후 육군본부 인사운영감, 인사참모부장 등을 거쳐 1981년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군기무사령부/사령관|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2.12에서 공을 세운 박희도가 서서히 약진하기 시작했으나 당시에도 육사 12기의 최선두는 군사정권의 두 핵심 요직[* 기무사령관과 수방사령관은 군사정권에서 최고 핵심 요직들로 꼽힌다.]을 꿰찬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관]] 박세직과 [[국군기무사령부/사령관|국군보안사령관]] 박준병이었다. 그런데 임명 직후 동기 박세직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2인자를 자칭했다는 제보에 격노한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박세직을 조사, 예편시키게 된다. 그야말로 [[윤필용 사건]] 시즌 2.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녹화사업]]을 기획, 시행했다. 박세직이 이렇게 아웃되고 12기 선두 주자는 박준병과 박희도가 남게 되었으나, 박준병은 총선을 위해 정치권으로 차출되게 되고 12기의 참모총장은 박희도가 하게 된다. [* 총선 전략 외에도 전두환은 박준병보다 무골인 박희도가 참모총장에 어울린다고 판단한 이유도 있었다. 또한, 자질은 차처하더라도 박희도는 전두환의 막대한 신임과 12.12에서 세운 공으로 이미 박준병을 앞서가기 시작해 먼저 대장에 진급했다.] 전역 전, 전두환은 박준병을 [[대장(계급)|대장]]으로 명예 진급[* 보안사령관은 중장 직위다. 전임 전두환, 노태우도 전역 전 명예 대장 계급장만 달고 정치계로 이적한 바 있다.]시켜준 후 예편시켰다. 1985년부터 제12대, 13대, 14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을 지냈다.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였으며 [[중선거구제]]인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한국당]] [[이용희(1931)|이용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제13대 국회에서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노태우의 지시를 받아 민주정의당 사무총장으로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접촉, [[3당 합당]]을 성사시킨다. 14대 국회의원 재임 중 [[김영삼]]이 박준병을 포함한 민정계에 압박을 강화하자 반발하여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한다. 1996년, 12·12 군사반란 중 ‘반란중요임무’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되자 지역구를 [[어준선]]에게 물려주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무죄 선고 이후 정계에 복귀, 자민련 사무총장을 맡는다. 1998년 7월 21일 서초갑 재보궐선거에 자민련-[[새정치국민회의]] 여권 단일 후보로 출마하나 [[한나라당]] [[박원홍]] 후보에 밀려 낙선한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옛 지역구였던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심규철]] 후보에 패배하자 다시 정계를 은퇴하였다. 여담으로 [[종교]]는 [[개신교]]이며 제15대, 18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이사철]]이 손아랫동서이다. == 선거 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85 ||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충북 영동/보은/옥천) ||<|2> [include(틀:민주정의당)] || '''88,047 (64.70%)''' || '''당선 (1위)''' || ||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충북 영동/보은/옥천) || '''59,449 (49.16%)''' || '''당선 (1위)''' || 1991년 [[3당합당]]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충북 영동/보은/옥천) || [include(틀:민주자유당)] || '''53,084 (50.87%)''' || '''당선 (1위)''' || 1995.10.14 탈당[br][[자유민주연합]] 입당 || || 1998 || [[1998년 재보궐선거#s-3|1998년 7월 재보궐선거]] (15대 국회 서울 서초 갑)[* 전임자 [[최병렬]]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로 사퇴] ||<|2> [include(틀:자유민주연합)] || 19,093 (36.16%) || 낙선 (2위) || 여권단일후보[br](DJP 연대)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충북 영동/보은/옥천) || 23,263 (25.70%) || 낙선 (3위) || || [[분류:1933년 출생]][[분류:2016년 사망]][[분류:태안 박씨]][[분류:옥천군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반란자]][[분류:5.18 민주화운동/관련 인물 및 단체]][[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분류:하나회]][[분류:제12대 국회의원]][[분류:제13대 국회의원]][[분류:제14대 국회의원]][[분류:민주정의당 국회의원]][[분류:민주자유당 국회의원]][[분류:자유민주연합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