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열사]][[분류:민주운동가]][[분류:학생운동가]][[분류:1964년 출생]][[분류:밀양 박씨]][[분류:1987년 사망]][[분류:서구(부산) 출신 인물]][[분류:질식사한 인물]][[분류:객사한 인물]][[분류:살해된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진보주의자]][[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혜광고등학교 출신]][[분류:모란공원 안장자]] [include(틀:다른 뜻1, other1=같은 이름을 쓰는 다른 인물들, rd1=박종철(동명이인))] ||||<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666666><tablewidth=420><tablebgcolor=#fff,#0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e0ffff 100%)" '''{{{+1 박종철}}}[br]朴鍾哲 | Park Jong Chul'''}}}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news/200906/08/segye/20090608105806.114.0.jpg|width=100%]]}}} || ||<|2><width=90><colbgcolor=#f5f5f5,#2d2f34> '''출생''' ||[[1964년]] [[4월 1일]][*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mobsr&logNo=221386503414|이 블로그 글]]의 사진들 중 한 장을 자세히 보면 박종철이 [[1964년]]생이라고 나온다.] || ||<(> [[부산광역시|부산시]] [[서구(부산)|서구]] [[아미동]] || ||<|2> '''사망''' ||[[1987년]] [[1월 14일]] (향년 22세) || ||<(> [[서울특별시]] [[용산구]] 갈월동 [[대한민국 경찰청|치안본부]] [[대공분실]] || || '''사인''' ||<(> 물고문 중 질식사[* 물고문 중 익사했다고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확한 사인은 외부의 경부압박으로 인한 질식사다. 즉, 욕조의 턱 부분에 목이 눌려서 목숨이 끊어진 것이므로 익사가 아니다.] || || '''본관''' ||<(> [[밀양 박씨]]|| || '''학력''' ||<(> [[혜광고등학교]] {{{-2 (졸업)}}}[br][[서울대학교 인문대학]] {{{-2 ([[언어학과]] / [[명예학사]])}}}[br]|| || '''직업''' ||<(> 학생운동가 || || '''부모''' ||<(> 아버지 박정기[* 1929년생, 2018년 7월 28일 사망.], 어머니 정차순 || || '''형제자매''' ||<(> 형 박종부, 누나 박은숙 || || '''인척''' ||<(> 삼촌 박월길 || >'''"종철이를 살려내라"''' >----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사망한 후 학생운동의 구호이다.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아들이 사망한 이후 한 말.[* 이 말은 [[6.10 민주 항쟁|6월 민주 항쟁]] 시위단의 플래카드에도 쓰였다.]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 학생운동가이자 민주 열사(烈士).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7년]] 1월 14일, 자정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다가 치사했다. == 생애와 성품 == [include(틀:한국 진보진영 관련 문서)] [[1964년]] [[4월 1일]] [[부산시]] 서구 아미동에서 아버지 박정기와 어머니 정차순의 2남 1녀 중 [[차남|셋째]]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박종부와 누나 박은숙이 있다.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해서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하였다. 고교 시절 단짝이었으며 함께 [[서울대]] 84학번으로 재수해 입학한 김치하의 말에 따르면, "얼굴이 하얗게 뽀얗고 피부가 맨들맨들한데 두꺼운 안경을 낀, 그 당시로서는 귀티 나는 친구"다고 한다. 더불어 회고하기를 "아주 성실하고 차분한 사람이었으며, 한번 자리에 앉으면 진득하게 공부하는 친구였다.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가족들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종종 마음이 담긴 편지를 보내곤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친구 최인호 역시 그의 첫인상에 대해 "외모나 인상이 순진하고 해맑은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동기들보다 정치의식이 상당히 높았다"고 설명했다.[[http://www.huffingtonpost.kr/2018/01/13/story_n_18997758.html#gallery/525374/3|1987년 1월 14일 이후 31년, 박종철을 기억하는 두 친구의 이야기]] 대학 생활 동안 [[동아리]] 활동과 농촌 활동([[농활]]) 등을 통해 사회의 모순에 눈을 떴다.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당시 농성지원 가두시위로 닷새간의 구류를 살았고, 여름방학에는 공활([[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 중 [[1986년]]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가두시위로 구속되어, 과거 전력으로 인해 [[7월 15일]]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출소했다. 다음은 박종철이 옥중에서 부모님께 쓴 편지들 중 하나. >아버지, 어머니. > >더운 날씨에 비는 오지 않고, 높은 하늘은 틀린 일기예보를 조롱이나 하는 듯이 연일 쨍쨍 내리쬐는군요. > >꽤 더운 편이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 합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비치 파라솔 밑에서 [[선글라스]] 끼고 한가하게 피서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먹고 잘 놀아서 피둥피둥 찐 살을 빼느라고 사우나탕, 헬스클럽 다니면서 땀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삼복더위에 [[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먼지와 기름 냄새로 가득찬 무더운 작업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노동자들에 비하면 저는 신선 놀음입니다. > >가족들의 그런 태도는 여기 갇혀 있는 저에게는 진정으로 위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딴 가족들은 면회 오면 어떻게든 꿋꿋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용기를 복돋아 주고 바깥 소식들을 전해주고들 하는데, 허구헌날 [[판사]]님 앞에 고개 숙여라, 판사가 무슨 내 할아버지라도 됩니까. >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 학생들이 구속되어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 >누가 우리를 구속시켰습니까. 저들을 미워합시다. 그리고 저들이 저들 편한 대로만 만들어 놓은 이 땅의 부당한 사회구조를 미워합시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마음 속으로 진실하게 믿는 용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제가 구속되어 있는 사실을 왜 쉬쉬합니까. 한 명에게라도 더 이러한 부당한 현실을 알리십시오. 내가 왜 구속되었는가를, 저들의 폭력성을, 우리들의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고발하십시오. 그럴 용기가 없으면 마음 속으로나마 바깥에서 오늘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 우리 친구들과 저처럼 싸우다 갇혀 있는 친구, 선배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라도 쳐 주십시오. > >엄마 아버지의 막내아들은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 >이만 줄입니다. > >[[1986년]] [[7월 8일]]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언어학과]] [[3학년]]으로 학생회장 직분을 맡았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이에 경찰은 '''[[개소리|"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아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이 대사는 영화 [[1987(영화)|1987]]에서 [[박처원]] 처장을 맡은 [[김윤석]]이 하게 되는데, 김윤석은 "내가 이 대사를 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87년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는, 이 얼토당토않은 변명거리가 신문지 헤드라인으로 도배된 걸 생생하게 기억하는 세대이기 때문. 뿐만 아니라 박종철의 혜광고교 2년 후배다.] == 추모 == [[1997년]] [[서울대학교/관악캠퍼스|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추모비와 흉상이 건립되었고, [[2004년]]에는 [[혜광고등학교]]에도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본래 혜광고 교정에도 흉상을 세우려 했지만, 혜광고에서 반대하여 추모비 만으로 타협했다고 한다. 1989년 박종철과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동아리 선후배들이 주축이 되어 '박종철출판사'를 설립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119023011|관련 기사]] [[https://www.facebook.com/parkpublisher/|박종철출판사 페이스북]] [[최인호(영어 강사)]] 항목 참고. [[2001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에서는 박종철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 및 학사학위증을 수여했다. 2018년 1월 13일, [[관악구]] [[신림동|대학동]] [[대학길|대학5길]]에 박종철 열사를 기리는 '박종철 거리'가 조성되었다. [[http://news1.kr/articles/?3205593|신림동 대학5길에 오늘 '박종철거리' 조성된다]] 2018년 3월 20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요양원에 있던 박종철의 아버지(89)를 만나 31년 만에 물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에 대해 직접 사과한 것은 처음 있는 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402977|#]] 이후 아버지는 검찰의 사과를 받은 지 4달 뒤, [[2018년]] [[7월 28일]] 아들 곁으로 떠났다. 박종철의 묘소는 유골을 산골하였기에 가묘이며 실제로는 아버지만 안장되어 있다. 1987년 1월 16일 아침에 벽제화장장(현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 후 [[임진강]]에 산골하였기 때문이다. 1989년 초혼장을 치룬 후 산골한 곳의 흙을 관에 담아서 가묘를 만들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사망한 민주열사들의 묘들이 있는 곳이다. [[전태일]], [[조영래]]의 묘지도 이곳에 있다.]에 이 가묘가 있다. == 기타 == * 생전 종교가 [[불교]]였던 걸로 추정된다. 대공분실에 친형 박종부와 스님이 추모하러 같이 온것도 그렇고, 자기 사후 31년만에 아버지가 별세하자 아버지 장례식장에 스님들이 모인 걸 보면 불교가 거의 확실하다. * [[혜광고등학교]] 시절, 오른쪽에서 2번째. [[http://v.media.daum.net/v/20180110134647969?rcmd=rn|관련 기사]] [[파일:20180110134648872ltwg.jpg]] * [[자이언트(드라마)|자이언트]] 53화에서 나온다. 그의 죽음 이후 이강모의 형 이성모는 조필연과 전두환 정권도 끝이라고 말한다. * 영화 <[[1987(영화)|1987]]>에서는 배우 [[여진구]]가 연기했다. 공교롭게도 [[박처원]] 역을 맡은 [[김윤석]]이 박종철 열사의 혜광고등학교 2년 후배이다. * 2019년 7월 3일 인터넷 쇼핑몰 [[무신사]]가 자사의 발목양말을 소개하는 카드뉴스 형식의 [[인스타그램]] 광고에서 '''"속건성.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책상을 탁쳤더니]] [[고인드립|억하고 말라서]]"'''라는 [[http://naver.me/xKIgHXUq|문구를 넣어 논란이 벌어졌다.]] 결국 무신사는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광고를 삭제하고 사과문을 게시했고, 박종철기념사업회에 후원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 관련 문서 ==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1987(영화)]] * [[6.10 민주 항쟁]] * [[이한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