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평원군 출신 인물]][[분류:1891년 출생]][[분류:197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2><tablealign=right><tablewidth=410><tablebordercolor=#0047a0><tablebgcolor=#fff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박정찬}}}[br]朴貞贊, 朴貞燦'''}}}}}} || ||<|2><width=80><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1년]] [[12월 9일]] || ||[[평안남도]] [[평원군(평안남도)|평원군]] 한천면 감입리 || ||<|2><color=#fff> '''사망''' ||[[1973년]] [[5월 5일]] || ||[[전라북도]] [[익산시]] || ||<color=#fff>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color=#fff> '''직업''' ||독립운동가 ||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정찬은 1891년 12월 9일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 감입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6일 평원군 한천시장에서 최한신(崔漢信)·계재곤(桂在坤)·[[서형묵]] 등과 함께 군중들을 주도하며 만세시위를 펴다가 붙잡혀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출옥한 그는 고향에서 한천청년단(漢川靑年團)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아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던 중 붙잡혔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그후 청년단은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특파된 [[김석황]]·임승업(林承業) 등을 영입하여 의용단(義勇團)의 국내 지부로 조직을 개편하였는데 그는 동단의 군무대리(軍務代理)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20년 6월 한천면의 자산가 최윤복(崔允福)으로부터 거액을 모금하는 등 독립운동자금 모연에 힘썼으며 의용단원들의 평남도청과 평양부청 폭파의거를 도왔다. 그러던 중 1920년 9월 일제 경찰에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로를 치렀다. 그후 그는 1926년 6월 조창준(趙昌俊)·김문수(金文洙)·허상옥(許相玉)[*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허상옥]]과 동명이인이다.]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1928년 3월에는 함북 웅기 기독교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국가의 흥망은 단결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붙잡혀 1개월간 고초를 겪었다. 1944년 11월에는 [[백기환]]·[[정찬조(1895)|정찬조]] 등과 함께 일본 군사시설과 신사(神社)에 방화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8.15 광복]] 후 익산에서 여생을 보내다 1973년 5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정찬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1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