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 [include(틀:역대 한국은행 총재)] ||<-2><tablewidth=400><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87cefa><tablebgcolor=#fff,#191919>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7cefa 0%, #87cefa 20%, #87cefa 80%, #87cefa)" '''[[한국은행|{{{#000000 제22대 한국은행 총재}}}]][br]{{{#000000 {{{+1 박승}}}[br]朴昇 | Park Seung}}}'''}}} || ||<-2> [[파일:external/img.seoul.co.kr/SSI_20130217170407.jpg|width=100%]] || ||<|2><bgcolor=#000000> {{{#ffffff '''출생''' }}} ||[[1936년]] [[2월 16일]] ([age(1936-02-16)]세) || ||[[전라북도]] [[김제시]] || ||<bgcolor=#000000> {{{#ffffff '''학력''' }}} ||이리공업고등학교 {{{-1 (졸업)}}} [br] [[서울대학교]] {{{-1 (경제학 / 학사)}}} [br] [[뉴욕주립대학교]] {{{-1 (경제학 / 석사, 박사)}}} || ||<bgcolor=#000000> {{{#ffffff '''현직'''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br] [[하나금융그룹]] 사회공헌위원장 || ||<bgcolor=#000000> {{{#ffffff '''경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한국은행]] 차장 [br] 중앙공무원교육원 강사 [br] 대한민국-사우디 경제자문단장 [br]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br] [[서울신문]] 경제논설위원 [br] 농업진흥공사 이사 [br] [[중앙대학교]]정경대학장 [br] [[경제개발5개년계획]] 조정위원장 [br] [[중앙대학교]] 경제연구소장 [br]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br] 중앙대학교 대학원장 [br] [[노태우정부]] 경제수석비서관 [br] 제20대 [[국토교통부장관|건설부 장관]] [br] [[국토통일원]] 정책고문 [br] [[대한주택공사]]이사장 [br] 교통개발연구원 이사장 [br] 제2건국운동 경제분과위원장 [br] 삼성물산 사외이사 [br] 한국경제학회장 [br] 국무총리실 자영자소득파악위원장 [br]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위원장 [br] 제22대 [[한국은행]] 총재 [br] 대통령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 }}} || [목차] == 개요 == 박승( 1936년 2월 16일- )은 교육자, 정부공직자, 금융인으로 역대 여러 정권에 걸쳐 봉직한 대한민국 [[경제학자]]로서 [[중앙대학교]] 정경대학장, 한국경제학회장,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국토교통부장관|건설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하였다. == 생애[*1 성장환경과 생애에 대한 상세내용은 < 한국현대인물열전 33인선> 현대인물연구회 2006년 9월, pp. 275-286. 김종필 <경제학자 박승 이야기> 율곡출판사 2011년. 박승 <하늘을 보고,별을 보고> 한국일보사 2010년 참조] == === 출생과 성장과정 === 일제 식민치하였던 1936년 2월 16일 전북 김제시 흥사동 313번지 제내 마을에서 부 박현식(朴賢植, 1894-1961)[*2 박현식은 1894년 1월12일 전북 김제시 흥사동 313번지 소작농가에서 출생. 독학과 한학으로 수련하여 한때 한의사로 개업하기도 했으나 일제하에서 고향에 백석초등학교 설립을 주도한 사회운동가로서 한평생을 한글 초서연구에 바쳤으며 그 연구결과는 한글씨(田씨)라는 책자로 정리되어 천안 독립기념관(자료번호 1-003910-000)에 보존되어 있다.]과 모 강신용(姜信用, 1895-1984)[*3 강신용은 1895년 4월 18일 전북 김제군 백산면 부거리 에서 출생. 평생 농사일과 길쌈으로 2남4녀를 기르고 교육시켰으며 말년에는 아들을 따라 서울시 갈현동에서 살았다.]의 2남4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 박혁거세(朴赫居世 기원전 69년-서기 4년)의 66세손, 고려 말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정제공(貞齊公)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9D%98%EC%A4%91|박의중]](朴宜中 1337-1403)의 21세손이다. 반산반야 농촌의 소작농가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논일 밭일 땔감 마련하는 일 등 온갖 농사일을 하면서 자란 그는 1948년 그곳 백석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익산시에 있는 이리공업고등학교(당시 6년제)를 기차통학 하였다. 이때 그는 집에서 목화를 심어 길쌈을 해 만든 옷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다녔으며 6년 동안 매일 새벽 김제 농촌 집을 나와 왕복 14Km를 걸어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수업료를 못내 시험을 못치고 돌아간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여름철 벼농사를 질때 무더위에 농민들의 땀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푸른 벼냄새가 어우러진 그 특이한 냄새를 평생 잊을 수 없어 자신의 호를 스스로 청도(靑稻)라고 지었다. 1954년 [[이리공고]]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해군사관학교]]에 지망하여 제13기로 합격하였으나 [[경제학]]을 공부코자 하는 열망 때문에 입학을 포기하고 1년 동안 주경야독으로 자습하여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하였다.[*4 이리공고 재학 중 교지 기림(技林)에 기계과 2학년 때는 ‘공업정신을 앙양하자‘라는 글을, 3학년 때는 ’남녀평등‘이라는 글을 발표.] 고향 부모님이 노환으로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학기 중 농사일 때문에 내려가는 일이 많았으며 학비 때문에 재학 중 군복무를 자원하여 마쳤다. 제대 후에는 논을 팔아 학업에 전념하여 3학년 이후에는 성적도 좋아졌으며 각종 학술행사에는 대학을 대표하기도 했다.[*5 1957년 11월2일 전국대학생 경제정책토론대회에 경제과 3학년으로 서울상대 발표자로 참여. 4학년 때인 1960 년 경제정책 토론대회에는 사회자로 참여. 서울상대 4학년 재학 중 동아일보에 논문 기고: ‘후진국경제개발방안의 소고’ 동아일보 1960년5월31일. ‘환율현실화의 제 문제점’ 동아일보 1960년7월5일. ‘개발정책에 대한 소고’ 동아일보 1960년10월4일. 재학 중 서울상대 교내학술지 상대평론에 기고; 경제과 3학년 박승, ‘ 한국경제의 위기와 부흥정책의 방향’ <상대평론> 1957년. 경제과 4학년 박승,‘불균형성장론’ <상대평론> 1960년. ] === 한국은행 입행, 조사부 근무 15년 === 1961년 졸업과 동시에 [[한국은행]] 입행시험에 합격하여 조사부에서 근무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되었다. 마침 그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전국 공무원, 교육자, 공기업경영자 등의 재교육을 위한 중앙공무원교육원이 출범하였는데 1962년부터 3년간 여기서 한국경제와 경제개발에 대한 강의를 담당하였다. 1969년에는 약 1년간 뉴욕 연방준비은행과 워싱턴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 업무연수를 다녀왔는데 이것이 최초의 해외나들이였다. 그 뒤 한국은행에서는 최초로 2년 석사과정 해외학술연수생 두 사람을 보내기로 했는데 여기 선발되어 36세에 늦깎이 공부를 위해 1972년 1월 가족을 두고 혼자 유학길에 올랐다. [[뉴욕주립대학교]] 올바니(Albany)에서 경제발전론을 전공하였는데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모두 주어진 2년 시한에 마치고 1974년 5월 귀국하여 한국은행에 복귀하였다. 박사학위 논문제목은 ‘노동력과잉 후진국에서 외자의 경제개발 효과’였다.[*6 한국은행 박승 조사역 미국 뉴욕주립대(Albany)에서 ‘노동력과잉 후진국에서 외자의 경제개발 효과’ 라는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한국경제신문 1974년 8월16일. 경제학 박사 박승 ‘이른바 경기대책의 공전’ , 중앙일보 1974년8월29일 및 30일 1면.] 이때는 세계적인 석유파동이 있던 때인데 당시 경제기획원 남덕우 장관의 요청에 의해 1975년4월부터 1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 경제자문단장으로 리야드(Riyad)의 경제기획성에서 근무하였다. 한국의 경제개발경험을 전수해 달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요청으로 5명의 자문단을 보내게 된 것이다.[*7 사우디에 경제자문단 5명 파견, 내외경제신문 1975년 7월 29일.] === 중앙대학교 경제학 교수 25년 ===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와서는 한국은행 조사부차장에서 중앙대학교 경제학교수로 전직하여 9월 학기부터 경제원론 경제발전론 국제경제학 등을 강의했다.[*8 중앙대 교수 박승 ‘수출인플레를 잡아라’ 내외경제신문 1977년 5월 22일.] 대학으로 전직하면서 전공분야인 "경제발전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977년 박영사에서 펴냈는데 이 책은 그 뒤 약 30년간 대학교재로 널리 이용 되었다. 이때부터 강단을 떠날 때까지 모든 과목에 대해 스스로 학생들로부터 강의평가를 받았으며 모든 시험은 시험지를 돌려주고 채점기준을 공시한 뒤 채점 잘못이 있을 때는 이를 정정해 주었다. 그리고 신문기고 방송출연 외부강연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으며[*9 박승의 신문과 기타 간행물에 대한 기고를 종합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일간신문 기고는 500여 편, 기타 간행물기고는 250여 편에 이른다. 박승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한국일보사 2010년 부록.] 1977년부터 3년간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겸직하기도 했다. 특히 이때는 민간연구소가 없어 대학교수들의 사회참여수요가 컸던 시기여서 정부의 물가 산업 농정 금융 세제 노동 행정사법고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문위원 또는 심의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교내외 활동을 바탕으로 1984년 중앙대학교 정경대학장으로 임명되었으며[*10 ‘중앙대 교무위원 대폭인사 단행’ 중대신문 1984년 3월 1일.] 1985년에는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 조정위원장을 맡았다. 1986년에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11 ‘금융통화위원에 박승’ 매일경제신문 1986년 1월 11일.]과 중앙대 경제연구소장을 겸직하였고 1987년도 한국국제경제학회장에 선출되었다.[*12 ‘한국 국제경제학회 새 회장에 박승 중앙대 교수’ 중앙일보 1986년 12월 16일.] 그리고 1988년 초에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장에 임명되었다. ===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과 건설부 장관 1년반 ===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런데 다음해 2월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면서 초대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13 ‘총리에 이현재, 대통령비서실장 홍성철, 제6공화국 조각 발표‘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1988년 2월 19일.] 노태우 대통령과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경제단체 등 사회각계의 추천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노태우대통령은 5년 임기중 200만호의 주택건설을 공약했는데 이 공약이행이 경제수석에게 부여된 최대과제였다. 당시 서울시에는 이러한 대규모의 집을 지을만한 땅이 없었고 주변은 그린벨트로 묶여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건설비서관 홍철 박사(훗날 인천대 총장)과 협의하여 서울도심에서 반경 25km 외곽에 신도시를 짓고 한 시간 출퇴근이 가능토록 지하철로 연결하기로 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이것이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 등 한국최초의 5대 신도시이며 이른바 한국의 1기 신도시이다.[*14 1988년 신도시를 기획할 때는 분당 평촌 산본 인천중동 등 4개였으나 주택가격이 계속 폭등하고 서울의 남북균형발전을 위해 1989년 일산이 추가되었다.] 신도시에 대한 계획이 완성되자 대통령은 이제 건설의 집행을 맡으라 하여 1988년 12월 제20대 건설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15 ‘강영훈 총리 조순 부총리, 대폭적인 개각 단행’ 경향신문 1988년 12월 5일.] 신도시 건설은 주택가격 폭등과 맞물려 심각한 부동산투기현상과 현지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시위 그리고 여야 간의 뜨거운 정쟁을 불러왔다. 그러한 와중에 건설총괄집행기구로 건설부내에 신도시기획단을 신설하고 건설시공, 토지보상, 건설자재수급 등 건설시공을 위한 기본 틀을 마련해 놓고 1989년 7월 장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16 5대 신도시 건설에 대한 기획, 집행, 반대시위, 국회 여야정쟁 등에 관해서는 서울경제신문 1989년 4월28일. 중앙경제신문 1989년 5월27일. 한국경제신문 1991년7월1일. 박승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한국일보사, 2010년, pp. 230-235, pp. 255-289 참조] === 한국은행 총재 4년 === 대학으로 돌아와서는 강의에 열중하면서 대표저서라 할 수 있는 ‘경제발전론’ 개정판을 냈다. 신문기고 방송출연 외부강연 등 사회활동도 다시 이어갔다. 대한주택공사 이사장(1993년),정부의 자영자소득파악위원회 위원장(1999년)[*17 자영자 소득파악위원장 취임과 활동에 대해서는 조선일보와 한국경제신문 1999년 4월 17일, 한겨레신문 1999년 5월 22일.]과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위원장(2001년)[*18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위원장의 취임과 활동에 대해서는 한국일보와 동아일보 2001년 2월 20일 참조.] 등 공직도 맡아 수행했으며 1999년에는 한국경제학회장으로 선출되었다.[*19 ‘한국경제학회장에 중앙대 박승 교수 선출’ 문화일보 및 한국경제신문 1998년 11월 19일] 2001년3월 65세 교수직 정년을 맞아 25년간에 걸친 교수직을 마무리하고 야인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 해인 [[2002년]] 초에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제22대 [[한국은행 총재]]로 임명되었다.[*20 박승의 한은총재 임명에 대한 관련기사는 매일경제신문 2002년 2월 21일, 한겨레신문 2002년 5월 6일 참조.] 당시만 해도 김 대통령과는 전연 모르는 사이였다. 4년간의 임기 중 역점사업은 한은법을 고쳐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일과 [[화폐개혁]]을 추진하는 일이었다. 한은법은 한은 부총재가 당연직 금융통화위원이 되고 한국은행의 예산을 정부로부터 독립시키는 내용의 개정안이 2003년 8월 국회를 통과하였다.[*21 2003년 8월 국회통과(2004년1월1일 시행)한 한국은행법 개정의 과정과 내용에 대해서는 <제7차 한국은행법 개정에 대한 역사적 조명> 한국은행 2006년. 매일경제신문 2003년 7월19일과 22일, 한국일보와 한국경제신문 2003년 7월23일. 박승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pp. 406-4012 참조.] 화폐개혁은 위폐방지와 품질개선을 위한 신권발행, 5만원권과 10만원권 고액권발행, 화페단위를 1,000:1로 줄이는 화폐단위변경 등 세 가지를 동시에 하려는 것이었다.[*22 ‘한은 화폐단위변경 구체안’ 조선일보 2004년 6월 7일, ‘화폐제도개혁 완결 못해 아쉬움’ 서울경제신문 2005년 4월 14일. 박승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한국일보사 2010년 pp. 419-424.] 그러나 신권발행과 5만원권 발행만 실현되고 나머지는 향후의 과제로 남겨둔채 2006년 3월 임기만료로 만 70세에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 퇴임 이후와 가족관계 === 그 후로는 사회봉사활동 이외 어떤 형태의 재취업도 한 일이 없다. 2018년부터는 [[하나금융그룹]]의 사회공헌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여기서는 어린이집을 지어 지방자치단체에 기증하는 일, 결손가정, 다문화가정, 탈북자들을 돕는 일, 그리고 소외계층을 위한 자선사업 등을 하고 있다. 젊어서부터 서너 차례 정치권에서의 참여요청이 있었지만 [[6.25 전쟁]]을 겪으면서 '''절대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바 있어 그러한 참여요청을 모두 사양하였다. 여생을 보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남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다짐에 따라 2010년 모교인 김제 백석초등학교에 영상실을 갖춘 도서관을 지었고 그 뒤 모교인 [[이리공고]]에 장학기금을 기증하였으며 [[김대중평화센터]]에도 운영기금을 냈다. 그리고 2020년에는 백석초등학교에 장학기금 10억원을 하나은행 신탁증서로 출연했는데 이로써 지금까지 25억원이 넘는 사재를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23 상세한 내용은 조선일보 2003년 3월 5일, 서울이코노미뉴스와 동아일보 2019년 3월 22일 , 서울경제신문 2019년 4월 1일, 조선일보 2020년 8월 3일.] 모교인 [[뉴욕주립대학교]](Albany)는 2004년 자랑스런 동문상을 수여했으며 2007년 5월 졸업식에서는 인문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24 동아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2004년 6월 7일.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2007년 5월 21일.] 2017년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문재인 후보의 자문위원장을 맡아 [[문재인]] 대통령 당선에 일조한바 있다.[*25 박승은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대결한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문재인을 지원하는 경제자문모임의 좌 장 역할을 했으며 2017년 대선에서는 문 후보를 지원하는 싱크탱크 ‘국민성장’에서 [[중도주의|중도]] [[실용주의]]적 경제를 주장하며 자문위원장을 맡았다. 한국경제신문 2012년 9월 28일, 이데일리 2012년 10월 4일, 중앙일보 2015년 12월 30일, 한국일보 2016년 10월 11일, 경향신문 2017년 5월12일 참조.] 1963년 권영하와 결혼하여[*26 권영하(權英夏)는 1938년 7월 25일 전북 익산시에서 부친 권직(權稷), 모친 나금(羅金)사이에서 출생하여 [[이리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졸업. ] 슬하에 2남3녀를 두고 11명의 손자녀가 있어 직계가족이 모두 23명에 이른다. 본인과 두 아들 그리고 세 사위가 모두 박사 학위를 가지고 학계나 연구소에 봉직하여 학자집안이라 할만하다. 현재에는 [[평창동]]의 자택에서 거주중. == 저서 == 1969 ‘한국경제성장론’ 일신사 1976 ‘경제발전론(대표저서,1990년 및 2000년 개정판)’ 박영사 1982 ‘s.s.쿠즈네츠’ 유풍출판사 1983 ‘한국경제정책론’ 박영사 1987 ‘근대경제성장론(s.s.쿠즈네츠 원저)’,(공역) 한국경제신문사 1996 ‘한국경제의 두 얼굴’ 고려원 2006 ‘ 한국경제의 역동성은 위기에서 나온다’ 한국은행 2010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자서전)’ 한국일보사 2011 ‘김대중을 생각한다’ (공저) 삼인 2012 ‘쫄지마, 청춘’ (공저) 한국일보사 2012 ‘내 인생 후회되는 한 가지’ (공저) 위즈덤 경향 == 상훈 == 1964 내각 사무처장 표창 1969 경제기획원장관 표창 1987 국민훈장 목련장 1989 청조근정훈장 2004 뉴욕주립대학교 동문상 2011 자랑스런 전북인 상 2014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상 2015 중앙대학교 총동창회 공로상 == 참고문헌 == ⦁ "한국경제의 산증인, 전 한국은행 총재 박승", 서울신문, 2013년 2월 4일. ⦁ 박승, 2010,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자서전), 한국일보사. ⦁ 한국인물연구원, 2011, <한국현대인물열전 33선>, 한국인물연구원. ⦁ 김종필, 2011, <경제학자 박승>, 율곡출판사.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987186| 윤춘호, 2020, [그, 사람] 무일푼 청춘에서 일궈낸 행복... '국민 경제교사'의 삶: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 외부링크 == [[https://www.kipa.re.kr/synap/skin/doc.html?fn=FILE_0000000000054797&rs=/convert/result/201512| "한국경제와 포용적 성장." 행정포커스. 2019년.]] [[http://www.kea.ne.kr/common/download?id=2012§ion=pub| "한국경제 위기와 구조개혁." 한국경제포럼. 2016년,]] [[https://www.youtube.com/watch?v=MiQ138eR-Lw CNBC| 제정임의 박승 인터뷰. 2016/3/31.]] [[https://www.youtube.com/watch?v=3sKo13Pdj44&t=| '한국경제의 길'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편/1부. 연합인포맥스 TV. 2015/7/20.]] [[https://www.youtube.com/watch?v=32z43HfEqvg&t=384s| '한국경제의 길'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편/2부. 연합인포맥스 TV. 2015/7/27.]] [[https://www.youtube.com/watch?v=sBnwPJhczoI|[고려대학교 Korea University] 제6회 KU 노사정포럼_박승(前 한국은행 총재). 2017/12/19]] [[https://www.youtube.com/watch?v=wH1Qpos0KlI&t=257s| "소득주도성장론". 2019/5/19]]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4950145&code=61121111| 전재산 기부 박승 전 총재 “부유층, 재산 절반만 상속하자”. 국민일보. 2020/8/27.]] [[https://www.youtube.com/watch?v=a4RU481aPeA| [오태훈의 시사본부] 추석특집 '코로나 이후, 다시 만난 세계 - 경제 분야'. 2020/10/7]] [[https://www.youtube.com/watch?v=hs4zBy3c_UU&t=802s| 박승 전 한은총재 "내년 집값 하향 안정화..'영끌'해서 집사면 낭패". 2020/11/9]] == 각주 == "국민 경제교사"라는 별명이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987186]] "당대재산자본주의" 즉 상속을 철폐시킴으로서 "세습자본주의"출현을 막아야한다는것을 주장한다. 단 절반은 상속하고 절반은 사회에 환원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분류:1936년 출생]][[분류:김제시 출신 인물]][[분류:상경계 교수]][[분류:한국의 경제학자]][[분류:수석비서관]][[분류:대한민국의 금융인]][[분류:노태우 정부/인사]][[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한국은행 총재]][[분류:건설부 장관]][[분류:국민훈장 목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