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반남 박씨]]로써 1629([[인조]] 7)∼1703([[숙종(조선)|숙종]] 29).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 호는 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서계(西溪).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 수십 명의 [[제자]]를 키웠다. 차남인 [[박태보]][* [[인현왕후]]가 폐서인되었을 때 부당함을 주장해 장살당한다.]는 [[윤증]]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 박세당은 윤선거 집안과의 교분을 이어갔다.[* 박세당의 문집인 『서계집』에는 윤증과 박세당이 서로에게 보낸 서신이 각각 22편, 26편이 수록되어 친분을 확인할 수가 있다.] == 생애 == 16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송시열]]의 편협함을 싫어해 [[노론]]과는 대립 관계였다.[* 박세당은 [[양명학]]과 노장 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자(철학자)|주자]]의 학설을 비판해 『사변록』을 지었는데 주자 골수론자인 송시열의 분노를 샀고 그 결과 송시열은 윤휴와 함께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규정하였다.] 결국 당쟁에 혐오를 느끼고 낙향해 [[경기도]] [[양주시|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1702년 [[이경석]]의 신도비명을 지은 일에서 송시열을 격하한 것 때문에 노론의 공격을 받고 [[전라도]] [[곡성군|옥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판윤 [[이인엽]]이 박세당의 아들인 박태보의 절개를 생각할 것과 고령의 박세당에게 [[유배]]를 보내는 것은 죽는 것과 같다는 [[상소]]를 올려 유배는 면할 수 있었고 1703년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행적에 대한 변론은 계속되어 박세당이 죽은지 약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조선)|경종]] 2)에야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이경석 신도비명 사건 === 1702년 박세당은 이경석의 [[후손]]에게 신도비명 찬술(撰述)을 부탁받고 자신의 마지막 글을 지었다. 생전에 송시열과 대립했던 관계인 박세당은 송시열이 이경석을 [[수이강 사건]]으로 조롱한 것을 비판하며 신도비명의 마지막을 이렇게 썼다.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君子何病) >나의 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我銘載石)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人其來敬) 노론과 송시열의 당여들은 이 글을 보고 뒤집어졌고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여겨 숙종에게 비문과 저서인 『사변록』을 불태우고 머나먼 벽지로 유배보내라고 숙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노론의 요구를 받아들여 비문과 『사변록』을 불살라버리고 박세당을 유배보냈다.[* 이경석 신도비는 50년이 지난 1754년 [[이광사]]의 [[글씨]]를 받아 겨우 건립되었는데 노론에 의해 글자가 깎여나가고 땅에 파묻혔다. 이후 1979년 이경석의 후손들은 비석을 재건하고 옆에 새로 글씨를 새긴 신도비를 함께 세워 오늘날 이경석의 묘에는 2개의 신도비가 있다.] == 사상 == 박세당의 근본 사상에 대해서는 유학의 근본 정신을 추구했다는 견해가 있고, 주자학은 물론 유학 자체에 회의해 [[노자|노]][[장자|장]]학(老莊學)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박세당이 당시 조선의 통치 이념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에 회의적이었다고 보는데는 이론(異論)이 없다. 박세당은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한 [[도가]] 사상(道家思想)에 깊은 관심을 보여 스스로 노장서(老莊書)에 탐닉하면 되돌아올 줄 모르고 심취하게 된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이러한 학문 경향을 지니게 된 배경에는 젊었을 때 지녔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적 사고 때문이었고 백성의 생활 안정과 국가 보위에 있어서 [[차별]]을 본질로 하는 [[유가(제자백가)|유가]] 사상(儒家思想)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도가 사상을 연구했다는 이유로 당시 [[유교]]를 국교로 하던 조선에서 많은 비난을 당했다. [[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반남 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