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박성용(朴聖容) || || 이명 ||박성용(朴成容)·박상룡(朴尙龍) || || 본관 ||[[밀양 박씨]] || || 생몰 ||[[1903년]] [[1월 17일]] ~ [[1963년]] [[8월 27일]] || || [[출생지]] ||경상북도 대구군 동중면 침산동[br](현 [[대구광역시]] [[북구(대구)|북구]] [[침산동(대구)|침산동]])[*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태현(1899)|박태현]]도 이 마을 출신이며, 친일파 [[박중양]]의 선대 세거지가 바로 이 곳이다.]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박성용은 1903년 1월 17일 경상북도 대구군 동중면 침산동(현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대구에서는 3월 8일 제1차 만세운동이 있은 후 학생들과 시민들의 항일저항의식은 더욱 높아져, 3월 9일 오후 3시경에는 [[계성고등학교(대구)|계성학교]] 학생을 비롯한 약 150여명의 학생들이 재차 의거를 단행하기 위해 [[달성공원]]으로 모여들다가 일제 군경에 탐지되어 강제 해산되기도 했다. 당시 그는 계성학교 학생으로 학교 선배이자 같은 마을 사람인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2177|박태현]](朴泰鉉)과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박남준(朴南俊)·김재소(金在炤) 등과 함께 3월 10일 태극기를 제작하여 계성학교 학생을 시위 대열에 참가하도록 독려하고 수백여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케 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그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개월형(미결구류 38일 합산)을 언도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북구(대구) 출신 인물]][[분류:밀양 박씨]][[분류:1903년 출생]][[분류:196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