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 align=right><bgcolor=white> [[파일:박상렬.jpg|width=300px]] || || 성명 ||박상렬(朴相烈) || || 생몰 ||[[1897년]] [[1월 8일]] ~ [[1981년]] [[6월 27일]] || || [[출생지]] ||[[전라도]] [[목포시|무안부]] 창평동 || || 사망지 ||[[서울특별시]]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상렬은 1897년 1월 8일 전라도 무안부 창평동(현. 전라남도 목포시 창평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서울에서 [[3.1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궁혁(南宮赫)·오도근(吳道根)·김영주(金永周)·권영례(權寧禮)·오재복(吳在福)·이금득(李今得) 등 학생들과 회합을 갖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얼마 후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서상봉]]·[[곽우영]]·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여성]]과 동명이인이다.]·[[박복영(독립운동가)|박복영]]·[[강석봉]]·양병진(楊炳震) 등이 별도로 독립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기독교 측과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태극기와 경고문을 제작, 등사하여 개별적으로 주민들에게 배부했다. 또한 각 구역별로 책임을 주어 인원 동원을 분담할 때 그는 목포 상업학교 학생동원을 맡아 활동했다. 1919년 4월 8일 오전 10시경,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영흥·정명학교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150명의 목포상업학교 학생들도 이에 가세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에 일본 경찰과 기마헌병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다. 이때 박상렬도 동생인 [[박상술]], 박상오(朴相五)와 함께 체포되었고 손발이 묶인 채로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 일로 동생 박상술은 정신 이상자가 되었고 결국 자살했다. 그 후 서울로 상경해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1년 6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박상렬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목포시 출신 인물]][[분류:1897년 출생]][[분류:198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