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독립운동가, rd1=박문규(1877))] ||<table align=center> [[파일:박문규.png|width=400]] || || 1934년 5월,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 朴文圭 [[1906년]] ~ [[1971년]]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농경제학자, 정치인.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密陽). == 생애 == 박문규는 1906년 [[경상북도]] [[경산시|경산군]] [[압량읍|압량면]] 조영동(현 [[경산시]] 조영동)[*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에서 대지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7&idx=4280|#]] 어려서 독선생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했고 경산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졸업하고 192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2기에 입학하였으며, 1927년 법문학부 법학과에 진학하여 졸업했다. 재학 중 법학과 동기생인 [[최용달]], [[리강국]]과 함께 사회주의 이념 서클인 경제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박문규, 최용달, 리강국, 이들 세 사람은 대학 동기로 만나 인생 반 생애를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함께 보내게 된다.] 당시 재정학 교수였던 일본인 사회주의자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점차 수용했다. 1930년 3월 대학을 졸업한 후, 모교인 경성제국대학에 남아 법문학부 경제연구실 조수 겸 법문학부 부설 만몽문화연구회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및 조선 농경제학을 계속 연구하는 한편, 물밑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해왔다. 이 때문에 1931년, 경성트로이카 [[이재유]]가 주도한 경성제국대학 반제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1934년 5월 22일 경기도경찰부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http://db.history.go.kr/id/ia_2034_1585|#]]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는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친우인 [[최용달]], [[리강국]]과 함께 참여했다. 8.15 광복 후에는 직업 정치가로 변모하여 건준, 인공의 중앙인민위원-재정부장대리를 역임했다. 남로당에서 활동하다, 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자 48년 8월 월북했다. 월북 후 북한 초대 농림상으로 발탁되었고, 그후로도 각종 고위직을 역임했다. 대학 동기생 [[최용달]], [[리강국]]과 달리 천수를 누렸다는 게 흥미롭다. 박문규, 최용달, 리강국은 대학 입학 후 해방전후까지 사회주의 운동가의 길을 함께 걸었다. 그리고 월북 후에는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 국가 체제의 기틀을 수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최용달은 법학자로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헌법의 초안을 기초하였고 이른바 '민주기지론'을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한국판 [[마타 하리]], [[김수임]]사건으로 유명한 리강국은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만주파]]가 공존하고 있던 초기 북한 정계에서 남로당의 중추로 활약했다. 그리고 박문규는 일제강점기 시기 사회주의 이론에 따라 조선의 농업경제를 연구하고, 해방후에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북한 농업구조의 재편을 주도했다. 여담이지만, 이들 셋 중 최용달, 리강국은 남로당계 숙청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끝내 목숨을 잃었다. 반면 박문규는 같은 남로당계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숙청 기간에 농림부상으로 강등되었을뿐 살아남았고, 이후에도 여러 요직들을 두루 거치며 정치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으로 재직하던 1971년에 사망했다. == 관련 문서 == * [[북한/인물]] [[분류:경산시 출신 인물]][[분류:밀양 박씨]][[분류:1906년 출생]][[분류:1971년 사망]][[분류:북한의 정치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경성제국대학 출신]] [[분류:경북고등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