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순천 박씨]][[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1915년 출생]][[분류:1983년 사망]][[분류:건국포장]][[분류:경성제국대학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 성명 ||박노태(朴魯胎) || || 본관 ||[[순천 박씨]][* 22세손 노(魯) 항렬.] || || 생몰 ||[[1915년]] [[10월 17일]] ~ [[1983년]] [[12월 19일]] || || [[출생지]]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덕산리[*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 || 사망지 ||[[서울특별시]]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포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노태는 1915년 10월 17일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덕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3년 9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 후 휘문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내선일체]]의 허구성에 대하여 한국과 일본은 민족성이 다르므로 융화가 어려울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일본 민족에 비해 한국 민족이 우수함을 강조하면서 내선일체를 거부하였다. 또한 그는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주시하면서 일제의 패전을 예견하는 한편 주위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숙지시키고 힘을 합하여 일제의 패전을 독립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였다. 이 일이 발각되면서 일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45년 4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3년 12월 1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노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3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