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박근철(朴根澈) || || 일본식 성명 ||미츠이 네시오리(光井根澈) || || 본관 ||[[밀양 박씨]] || || 생몰 ||[[1920년]] [[7월 9일]] ~ [[2007년]] [[4월 16일]] || || [[출생지]]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여천리[br](현 [[울산광역시]] [[남구(울산)|남구]] 여천동)[*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 || 사망지 ||[[경상남도]] [[김해시]]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박근철은 1920년 7월 9일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여천리(현 울산광역시 남구 여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0대 때 일본으로 유학가서 1938년 4월 [[나가사키]]현립 [[이사하야시|이사하야]](諫早) 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다. 당시 그는 일본식 이름인 미츠이 네시오리(光井根澈)를 쓰고 있었지만 내심 2등 국민으로 취급받는 것에 반감을 품고 동지 [[심재인]]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일 계획을 논의했다. 1941년 미에(三重)고등농림학교(현 미에대학 농학부)에 진학한 그는 동지들과 자주 독립에 대해 토의했다. 1941년 12월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그는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고향 후배들에게 징병 또는 학도병을 기피하고 때를 기다리라고 권유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그러나 이 일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1942년 23월 예천(醴泉) 경찰서로 압송되어 장기간에 걸친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1943연 5월 7일 치안유지법 위반 및 육해군 형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3월에 가출옥했다. [[8.15 광복]] 후에는 경상남도 김해시로 이주했고, 2007년 4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에 박근철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7년 사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남구(울산) 출신 인물]][[분류:1920년 출생]][[분류:2007년 사망]][[분류:밀양 박씨]][[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