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투 목록]] ||<tablewidth=730><-3><tablealign=center><#C0C0FF><:> {{{+2 '''밀비우스 다리 전투'''}}} || |||||| [[파일:밀비우스 줄리오 로마노.jpg|width=700]] || |||||| 밀비우스 다리 전투 프레스코화. 줄리오 로마노 作, 1520~1524년 || ||||||||<#C0C0FF> '''시기''' || ||<-3> [[312년]] [[10월 28일]] || ||||||||<#C0C0FF> '''장소''' || ||<-3> [[로마]] 테베레 강의 밀비우스 다리 || ||||||||<#C0C0FF> '''원인''' || ||<-3> [[사두정치]]의 모순 || ||<width=10%><#C0C0FF> '''교전국''' ||<width=20%>[[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Vexilloid_of_the_Roman_Empire.svg.png|width=23]] 로마 제국 ||<width=20%>[[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Vexilloid_of_the_Roman_Empire.svg.png|width=23]] 로마 제국 || ||<#C0C0FF> '''지휘관''' ||[[콘스탄티누스 1세]] ||<^|1>[[막센티우스]] † || ||<|2><#C0C0FF> '''병력''' || ||50,000여명 ||75,000 명 ~ 120,000 명 || ||<|2><#C0C0FF> '''피해''' || ||300 ~1,100 명 ||40,000 ~ 90,000 명 || ||||||||<#C0C0FF> '''결과''' || ||<-3> [[콘스탄티누스 1세]] 군의 승리 || ||||||||<#C0C0FF> '''영향''' || ||<-3> 콘스탄티누스의 서방 통일 || [목차] == 소개 == 영어 :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파일:external/thekingdomiswithinyou.com/constantines-vision.jpg]] [[사두정치]] 체제의 내재적인 모순으로 황제 간 협동이 안 되자 ~~아니면 그냥 내 야망 때문에~~ 그걸 다시 정리하기 위한 [[로마 내전]] 중의 한 전투. 로마 제국의 공동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2년]] [[10월 28일]] 경쟁자 [[막센티우스]]와 로마 시 근교[* 로마 시 북쪽에 있고, 다리 밑의 강은 다름 아닌 테베레 강이다.]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막센티우스가 여기서 죽게 되어 콘스탄티누스는 서방을 통일했다. 막센티우스는 기병 전력에서 앞선 콘스탄티누스 군 기병이 우회 돌격해오는 것을 막고, 콘스탄티누스 군 보병대가 축차투입될 수밖에 없는 좁은 다리라는 병목지점을 보병 전투력에서는 로마군 최강이던 [[프라이토리아니]] 전력으로 방어하려 했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처럼 직접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다리로 정면 돌격하여 막센티우스 군의 방어선을 정면에서 분쇄하고, 혼란에 빠진 막센티우스 군은 좁은 다리로 몰렸다가 [[배수진]] 처럼 몰살당했다. 막센티우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는데,[* 따지자면 퇴각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했는데, 그런 강물과 다리 자체가 전장이었으므로 사고사라기보다는 전사로 보는 것이 더 맞는다. 바다나 강에서 선박끼리 해전을 치르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사고사가 아니라 전사로 보는 것과 같다.] 공교롭게도 자세히 보면 이 가족은 불쌍한 게 부([[막시미아누스]], 처형), 자([[막센티우스]],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전사), 녀(파우스타, 후계구도와 궁정음모로 처형)가 '''다 콘스탄티누스에게 죽는다.'''(...) 여기에 그는 죽은 뒤 콘스탄티누스의 승리와 로마 입성 행진에서 시신이 창에 꿰였고 또 그게 경고의 의미로 북아프리카로 보내지는 등 험한 꼴을 당했다. 로마 근위대, 즉 [[프라이토리아니]]가 [[회광반조|마지막 불꽃]]을 산화한 전투이기도 하다. 기록에 따르면 막센티우스가 전사하고 다른 아군들이 전부 도주하는 상황에서도 프라이토리아니는 위치를 사수하며 최후까지 저항하였다고 한다. 전투력의 쇠퇴와는 무관하게 마지막까지 근위대라는 자부심은 있었던 것이다. <비잔티움 연대기>에 의하면, 퇴각 중에 공병대원들이 다리의 너트와 볼트를 뽑는 타이밍을 잘못 잡아서 ~~[[아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큰 추락사고가 났고 거기에 황제 막센티우스도 휩쓸려 죽었다고 한다. == 다리 == ||[[파일:밀비우스 르브룅.png|width=800]]|| 샤를 르 브룅의 미완성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제라르 오드랑의 판화, 1666년 해당 전투가 벌어진 다리는 오늘날의 그 위치에도 존재한다. 이탈리아어 이름은 [[https://en.wikipedia.org/wiki/Ponte_Milvio|Ponte Milvio]]. 위키 백과에 따르면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 기원전 206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처음으로 다리가 세워졌다. * 기원전 109년 부수고 새로 지었으며,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카틸리나]]의 밀서가 여기서 입수되어 결국 진압의 실마리가 되었고 밀리우스 다리의 전투가 펼쳐졌다. * [[중세]] 말에는 붕괴 위기로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자력으로는 안 되어 외부 전문가에게 수리를 의뢰해서 성공한다. * 18~19세기에 모양이 확 바뀌었다가, 1849년 [[이탈리아 통일]] 전쟁 중 [[프랑스군]][* 로마 교황은 로마와 그 근처 이탈리아 중부지방의 영주이기도 했는데, 통일된다면 그 땅을 다 뱉어내야 한다. (뱉어내고 이탈리아에 완전히 소속시키자 항의의 표시로 [[바티칸 포로]] 상태로 있다가, 무솔리니가 이런 난국을 해결하고 국민과 교회의 지지를 얻고자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한 결과 지금 바티칸이 탄생한 것) 옛날 서로마 말기 ~ 롬바르드 때와 달리 교황청/교황직 자체의 존립이 위험할 가능성은 전혀 없고 이탈리아 통일 당시에도 없었지만, 그 때의 동로마-프랑크-롬바르드 사이에서 신변의 안전을 꾀했던 안습했던 시절은 트라우마로 남았기에 로마 시 말고도 주변의 완충지역을 확보하고자 했고 그 결과가 교황령이었다. 그래서 치열하게 지키고자 했고(이런 거 다 빼도 있는 땅 뺏기고 싶겠는가, 교황도 사람인데) 그래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제휴해 [[프랑스군]]을 파견받아 안전보장을 받았었다. 로마 시내 주둔군만으로 안 될 것 같자 프랑스군이 북쪽에서 증원을 오는 것이었다.]을 저지하려는 [[가리발디]]가 [[장판파|다리를 끊었지만]] 바로 다음해(1850년) 교황 [[비오 9세]]가 다시 수리했다. * 오늘날에는 커플용 관광상품(...)을 내세워 로마 교외의 관광명소 중 하나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 기적 == 사실 전투 자체의 의미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위 그림처럼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의 환상을 보았다는 전승으로 유명하다. ||[[파일:external/static.newworldencyclopedia.org/Dream_of_Constantine_Milvius_BnF_MS_Gr510_fol440.jpg|width=100%]]||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앞두고 [[십자가]] 꿈을 꾸는 중세의 기록화.[* 그래서 콘스탄티누스가 카롤루스풍으로 그려져 있다. 의외로 제관과 복식 등의 고증은 봐줄 만한 수준.]|| 이 일화에 따르면 전투를 치르기 전 어느 날 밤, 콘스탄타누스 황제가 막사에서 꿈을 꾸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이 표시로 너는 승리할 것이다(In hoc signo vinces : 영어로 In this sign, ((you will or you shall) conquer)'[* 정작 저 사진 속의 글자는 라틴어도, 영어도 아닌 그리스어이다.(...)]라는 글자를 보게 된다. 꿈에서 깬 황제는 이 꿈에서 본 십자가 모양의 군기를 만들어 앞장세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 전승이 기록된 <콘스탄티누스 황제전(De Vita Constantini)>을 쓴 에우세비우스는 황제 본인으로부터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맹세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후에 17세기 계몽 시기에 이르러 이 일화의 사실성에 대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따져 보아도, 같은 사람(에우세비우스)가 저것보다 이전인 325년에 썼던 <교회사>에서는,[* 위의 황제전은 당연히 콘스탄티누스의 사망 후에 쓴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고 한다. 있었으면 안 썼을 리가 없을 텐데... 오히려 <교회사>에서는, 하느님의 계시가 아니라 황제 본인과 그 자식들이 그려진 깃발이었다고 한다. 전투 현장에 있었던 몇 만 명의 병사들도 그렇고.[* <비잔티움 연대기>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군만 보병 9만+기병 8천으로 9만 8천명이었다고 한다.] 그냥 그만큼 당시의 콘스탄티누스가 이 승리에 대해 간절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위의 에우세비우스는 이에 대해 자신의 미래가 걸렸다는 엄청난 중압감 속에서 신적인 계시를 달라고 열렬히 기도했다고 한다. ~~그냥 뻥인 것은 알지만 기독교 공인도 해주시고 했으니 좋게 좋게 써 주자.~~] ==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 [[늑대와 향신료/고증|중세 고증으로 유명]]한 소설 [[늑대와 향신료]]에서 [[크래프트 로렌스]]가 [[현랑 호로]]에게 토르힐트 공화국 건국 설화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각색한 장면이 등장한다. >대원정에 참가한 고명한 기사단이 이교도들의 군대에게 고전을 하고 있을 때였어. 하늘에 붉게 물든 해질녘이 가까워지자, 이젠 한계로구나 하며 지휘관이 퇴각 명령을 내리려는데 돌연 전장 일대에 그림자가 진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든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봤대. 새하얗고 [[십자가|거대한 교회의 문장]]이 온 하늘 가득 펄럭이고 있는 모습을." >(중략) >"맞아. 지나가던 새 떼였어. 하지만 기사단은 기적을 보았으니 질 리가 없다면서 사기충전했고,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의 몇 시간 사이에 상황을 뒤엎어 그 싸움에서 이기고야 만 거지. 그 이후로 그곳에 생겨난 나라의 깃발은 그때의 모습을 따서 붉은 천에 흰 교회의 문장을 넣게 되었고, 이로써 기적은 만들어져 가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 >'''『늑대와 향신료』 12권''' 145~146p [[분류:고대 로마]] [[분류:로마 제국]] [[분류:로마 내전]] [[분류:지상전]] [[분류:4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