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귀족)] || 성명 ||민태곤(閔泰崑) || || [[본관]] ||[[여흥 민씨]] || || 생몰 ||[[1917년]] [[12월 17일]] ~ [[1944년]] [[11월 22일]] || || [[출생지]] ||[[경성부]] 입정정[br](현재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입정동) || || 사망지 ||센다이형무소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민태곤은 1917년 12월 17일 경성부 입정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조선귀족]]으로 지정되어 남작의 작위를 받은 민규현이다. 그는 1934년 12월 15일 남작 작위를 승계받았지만 내심 한민족을 억압하는 일제에게 반감을 품었다. 1940년 [[도호쿠제국대학]] 문학부에 재학하던 그는 그해 5월경부터 뜻을 함께하는 오창근(吳彰根)[*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오창근]]과 동명이인이다.] 등 조선인 유학생들과 모임을 거듭한 후, 조선민족 독립을 위하여 지도자로서 조선민중을 지도, 계몽할 수 있는 이론체계를 정비함과 동시에 자기의 실력양성에 노력하기로 합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서기로 하였다. 마침내 신정호준(新井鎬俊) 등 5명을 동지로 결집하여 총 12명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후 각자 하숙집에 수차례 모인 그들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이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은 중심모체가 없었기 때문이며 이제 이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각 운동자의 지도계몽에 임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실천활동으로, 첫째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운동 단체의 건설을 위해 사회주의사상의 채용 및 연구, 둘째 조선 내 신분제도의 타파, 셋째 학생들에 대한 군사교육 및 [[창씨개명]] 반대, 넷째 조선에서의 의무교육제도 실시, 다섯째 재일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개선 등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일이 발각되었고, 민태곤은 1941년 12월 경찰에 체포되어 1943년 4월 22일 센다이지방재판소에서 기소 유예 판결을 받고 미결수 신분 상태로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1월 2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민태곤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여흥 민씨]][[분류:중구(서울) 출신 인물]][[분류:1917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도호쿠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