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 align=right><bgcolor=white> [[파일:민충식.jpg|width=300px]] || || 성명 ||민충식(閔忠植) || || [[본관]] ||[[여흥 민씨]] || || 생몰 ||[[1890년]] [[2월 25일]] ~ [[1977년]] [[11월 16일]] || || [[출생지]] ||[[한성부]] 북부 안국방[br](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 || 사망지 ||[[경기도]] [[시흥시|시흥군]]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민충식은 1890년 2월 25일 한성부 북부 안국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2년 일본 도쿄에 유학가서 공부에 전념했다. 이때 그는 엄영달(嚴永達), [[조소앙]] 등 동지들과 함께 [[이승만]]을 미국으로 환송하고 독립운동지사들과 교류하면서 항일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13년 연해주로 건너간 그는 [[이상설]], [[이동녕]]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 밑에서 한인 교포들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한 몫을 담당했으며, 1916년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한국교민의 단결을 위한 체화동락회( 華同樂會)를 조직하고 [[신규식]]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했고 의정원 의원을 맡았다. 1919년 말에는 충북 영동군 조사원에 임명되었으며, 1922년까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1921년에는 협성회(協誠會)를 조직하여 주재하는 한편 함영구락부(含英俱樂部)를 운영했다. 1922년 개최된 [[국민대표회의]]가 개조파와 창조파 간의 극한 대립으로 파행을 거듭하자, 그는 김용식, 이기용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사유를 묻는 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 참가 단체 간에 분규가 계속되자, 그는 1922년 7월 [[안창호]], 최창식, [[신익희]], [[차이석]]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그는 [[8.15 광복]] 후 국내로 귀환했으며, 1977년 11월 16일 시흥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민충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여흥 민씨]][[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1890년 출생]][[분류:197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