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B0B3B><bgcolor=#0B0B3B><:>'''{{{#ffde09 역임 지위}}}'''|| ||<bgcolor=#fff,#19191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궁내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농상공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학부대신)] ---- [include(틀:조선귀족)]}}} || ||<-2><table align=right><tablewidth=400><colbgcolor=#0B0B3B><colcolor=#ffde09> [[조선귀족|'''{{{#ffde09 조선귀족 자작}}}''']][br]'''{{{+1 민영소}}}[br]閔泳韶 | Min Yeong-so'''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閔泳韶.jpg|width=100%]][br]{{{#!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閔泳韶_Min_Yeong-so.jpg|width=100%]]}}} }}} || || '''이름''' ||<colbgcolor=#fff,#1f2023><(> 민영소 (閔泳韶) || || '''본관''' ||<(> [[여흥 민씨]] || || '''자''' ||<(> 순약 (舜若) || ||<|2> '''출생''' ||<(> [[1852년]] (철종 3) [[3월 21일]] || ||<(> [[경기도]] [[양주시/역사|양주군]][br](현 [[대한민국|[[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25]]]] 경기도 양주시) || || '''사망''' ||<(> [[1917년]] [[3월 10일]] (향년 65세) || || '''직업''' ||<(> [[관료]], 정치가 || || '''종교''' ||<(> [[유교]](성리학) || || '''작위''' ||<(> [[조선귀족]] [[자작(작위)|자작]] || || '''주요 경력''' ||<(> 호조판서[br]궁내부 대신[br][[중추원#s-2]] 의장 || || '''비고''' ||<(> [[친일인명사전]] 등재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b1170_001.jpg]] 민영소(閔泳韶, 1852 - 1917)는 [[구한말]]의 관료이자 정치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귀족]] [[자작(작위)|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순약(舜若)이다. 민씨 일족에 속해 빠른 승진을 거듭했는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쳤다. 하지만 임오군란이 일어나며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불타는 일이 있었고, 1894년에는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홍종우]]를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했다. [[1904년]] 농상공부 대신에 오를 때까지 요직을 거쳤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 일생 == [[1852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났다. 본래 민철호(閔哲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후 민규호(閔奎鎬)에게 입양되었다. [[1878년]] 문과에 급제해 [[여흥 민씨]] 가문의 일원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1881년 대교에 임용되어 남학교수 동부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우승지 이조참의, 조사오위장 겸 보덕, 대사성, 춘천부사 등을 지냈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목숨은 건졌으나 살고 있던 가옥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는다. 2년 후인 [[1884년]]에는 [[갑신정변]]을 무난히 극복한 공을 인정 받아 계속해서 빠른 승진을 이어나가게 된다. [[1886년]] 종2품으로 승진하여 이조참판, 예조참판, 부제학, 대사성, 도승지, 공조참판, 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1889년에는 정2품으로 승진하여 [[형조판서]], 내무협판, [[이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홍문관]] 제학, [[궁내부]] 특진관, [[규장각]] 학사 겸 일강관, 전선사 제조, 양지아문 총재관, 판돈녕, [[학부|학부대신]], 궁내부 대신, [[농상공부|농상공부대신]], [[중추원#s-2]] 의장, 규장각 지후관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1894년]] [[홍종우]]를 통해 망명 중이었던 [[김옥균]]을 암살했다. 같은 해 6월 23일부터 28일까지 [[한성판윤]]을 지냈다. 하지만 [[7월]] [[갑오개혁]] 때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897년]]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다. [[1909년]] 일본관광단 일원으로 일본시찰을 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1월 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7년]] [[3월 10일]], 65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자작 작위를 민영소의 아들인 민충식에게 습작되었다.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두 명단에는 민영소의 자작위를 습작한 민충식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각주] [[분류:조선귀족 자작]][[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수작, 습작]][[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관료]][[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정치]][[분류:양주시 출신 인물]][[분류:여흥 민씨]][[분류:이조판서]][[분류:예조판서]][[분류:병조판서]][[분류:조선의 문신]][[분류:수구파]][[분류:1852년 출생]][[분류:191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