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pic.pimg.tw/1438827660-417011977.jpg|width=80%]] '''{{{+1 [ruby(溝口, ruby=みぞぐち)] [ruby(健二, ruby=けんじ)] }}}''' ([[1898년|1898.]] [[5월 16일|5. 16]] - [[1956년|1956.]] [[8월 24일|8. 24]]) >'''" 미조구치, 미조구치, 미조구치. "''' >---- > ㅡ [[장 뤽 고다르]], 존경하는 감독 3명을 묻는 질문에 답하며 [목차] == 개요 == [[일본]]의 [[영화 감독]].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일본 영화의 4대 거장'''으로 꼽히는 감독이다. '''일본 [[고전주의]] [[영화]]의 상징'''으로 통하며,[* 이에 스페인 영화 감독 빅토르 에리세는 미조구치를 "일본의 [[존 포드]]"라 평하기도 하였다.] 한 컷에 평균 5분을 넘는 [[롱테이크]]로도 유명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평균 1분 컷보다 훨씬 길다!] 흔히 '거장'이라 불리는 일본 감독들 중 가장 앞선 경력을 자랑하며, 당대 일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말년인 [[1950년대]]부터 서구에 알려져 좋은 평가를 받으며, 세계 영화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 소개 == [[여동생]]을 [[게이샤]]로 팔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학대를 일삼았다. 결국 생계를 위해 13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1920년]] 닛카츠(日活)영화사에 입사했다. 처음 취직해서는 배우로 일하기도 했으며 [[1923년]]에 각본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의 영화는 주로 [[에도 시대]]나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핍박받는 여인의 삶을 묘사한다. [[남성]]에게 지배당하는 [[여성]]의 삶에 대한 깊이있는 묘사로 최초의 대중적 [[페미니스트]] 감독으로도 꼽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상처받는 여성들에 대한 [[동정]]에 가까워 실제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있다. 실생활에서도 페미니스트와는 거리가 멀어서, 첫 아내가 그의 [[불륜]]과 [[권위주의]]에 견디다 못해 [[자살]]했으며, 그와 사귀다 배신당한 [[게이샤]]에게 칼을 맞고 부상당하기도 했다.(...)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인 [[오즈 야스지로]]와 여러모로 비교된다.-- [[오즈 야스지로]] 못지 않게 형식미를 추구하는 감독이었으나 오즈가 많은 컷을 사용하면서 [[카메라]]의 이동을 자주 했던 것과 달리, 한 컷이 5분 이상을 넘는 [[롱테이크]]를 사용해서 인물의 감정에 접근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1950년]]대 초반에 일본 영화가 유럽에 처음 소개될 당시 이러한 미조구치의 롱테이크에 감화된 평론가와 감독들이 많았으며, 특히 [[장 뤽 고다르]]를 포함한 [[누벨바그]] 세대들이 미조구치 스타일에 경도되고 영향받았다. 지독한 [[완벽주의]]자였으며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 예화로, 당대의 최고 여배우였던 다나카 키누요는 역할을 위해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으라고 강요 당했으며, 와카오 아야코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별명(비하하는 의미)으로 불렀다고 한다. 스가이 이치로에겐 "너는 [[뇌]]에 [[매독]]이 있으니, 의사에게 가봐라." 라고 말했으며, 〈산쇼다유〉 촬영 때는 아역을 향해 "이 아이는 어쩔 수 없는 [[바보]]구나!" 라고 말해, 근처에 있던 모친을 낙담시켰다(...) --[[존 포드|어디서 많이 본 성격이다?]]-- 무려 '''15편'''의 영화를 함께한 다나카 키누요와는 절친한 사이였지만, 다나카 키누요가 감독으로 데뷔할 때는 "다나카의 머리로는 감독을 못한다."는 발언을 하였고, 그 때부터 사이가 멀어졌다. 미조구치의 조감독이었던 신도 카네토 감독과 다나카 키누요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미조구치는 다나카 키누요를 짝사랑 했었고, 여러 차례 구혼을 하기도 했었지만, 다나카 키누요는 미조구치에게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해 미조구치 겐지를 찼다고 한다. 1956년, 58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별세했다. == 기타 == * [[1950년대]], [[일본 영화]]가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할 때, 온갖 쟁쟁한 선배들을 재치고 경력 짧은 [[구로사와 아키라]]가 먼저 인기를 얻었는데, 이에 대해 유명한 일화가 남아있다. >[[1951년]] [[9월 1일]], [[베니스 영화제]]에서 한 번도 서방세계에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는 일본 영화, 게다가 처음 들어보는 감독의 영화에 황금사자상을 안겨주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라쇼몽〉]]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미조구치 겐지는 이 소식을 접하자 첫마디로 신음을 내면서 '''"하필이면 구로사와가…"''' 라는 그 유명한 탄식을 했다. [[https://www.kmdb.or.kr/story/166/3483|#]] 후배의 성공을 발판 삼아, 미조구치는 말년에 다양한 작품으로 해외 진출을 시도했고,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 서양의 많은 [[영화 평론가]]들이 [[임권택]]을 미조구치의 후계자 중 하나로 꼽는데, 정작 임권택은 미조구치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만 임권택은 해외 영화제를 자주 다녀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에도 일본 영화를 쉽게 접할 수는 있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유명 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임권택도 동양인에게 정서적으로 비슷한 성향의 어떤 것이 있어서지 거기에 무슨 표절을 했겠냐" 라는 식으로 변호를 했다고 한다.[[https://www.kmdb.or.kr/story/5/1317|#]][* 다만 사토 다다오의 이 발언은 사토 다다오 본인이 공개 석상에서 말한게 아니라 사석에서 임권택 감독에게 말한 내용이라고 한다.] == 대표작 일람 == 연출한 작품은 90편. 남아있는 작품은 31편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엔 대표작들만 나열한다. * 기온의 자매 ([[1936년]]) * 마지막 국화 이야기 ([[1939년]]) * [[겐로쿠]] [[추신구라]] 2부작 ([[1941년]]~[[1942년]]) * 밤의 여자들 ([[1948년]]) * 서학일대녀-오하루의 일생 ([[1952년]]) * [[우게츠]] 이야기 ([[1953년]])[* 《[[카예 뒤 시네마]]》 선정 1959년 프랑스에서 상영되었던 10대 영화 중 1위. 2016년 칸 영화제 클래식 부문 상영] * 산쇼다유 ([[1954년]])[* 이 영화의 엔딩장면을 고다르가 매우 극찬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다르가 비평가로 있던 잡지 [[카예 뒤 시네마]]가 선정한 1960년 프랑스에서 상영되었던 최고의 10대 영화 목록에 올랐고, 그 중 1위로 지정되었다.] * 치카마츠 이야기 * 신 헤이케 이야기 ([[1955년]])[* 《[[카예 뒤 시네마]]》 선정 1961년 프랑스에서 상영되었던 10대 영화 중 5위.] * 양귀비 ([[1955년]])[* 《[[카예 뒤 시네마]]》 선정 1959년 프랑스에서 상영되었던 10대 영화 중 9위.] * 적선지대 ([[1956년]]) [[분류:일본 영화 감독/ㅁ]][[분류:1898년 출생]][[분류:1956년 사망]][[분류:분쿄구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