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몰타의 역사)] [목차] == 고대 == 석기 시대 몰타에 거주하던 선주민들은 [[화전]] 농업에 의한 섬 환경 파괴와 지력 고갈로 전멸[* 과거 [[윤작]]과 [[비료]]가 발달하기 이전 고대 농업은 지력을 서서히 고갈시켰고, 이는 [[청동기 시대]] 수천년 동안 이어지며 [[근동|비옥한 초승달 지대]] [[사막화]]의 원인이 되었다.]하고, 한동안 무인도로 유지되다 기원전 4000년경부터 다시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Malta9.jpg|width=430]] 지어진지 6천년 이상인 거대한 거석 구조물 유적들을 많이 지었는데, 그 규모도 엄청난데다 나비 모양 등의 복잡한 구조의 석실이 있는 완전한 석조 건축물이다. 거석 구조물을 건설한 주민들도 기원전 2350년경 역시 화전 농업에 의한 지력 고갈로 몰락했다. 기원전 7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의 식민지가 된 몰타는 페니키아 본토의 도시들이 약화되자 그 후신인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았다.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섬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몰타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를 잇는 무역 기지가 되었으며, 이 와중에 그리스 문화의 많은 요소가 도입되기도 했으나, 섬 주민은 페니키아계였다.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몇백년에 걸쳐 지중해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기독교]]의 [[사도 바울로]]가 로마로 압송될 때 배가 풍랑을 만나서 몇십일에 걸쳐 표류하다 기적적으로 도착한 멜리테(Μελίτη / Melítē)가 바로 오늘날의 몰타에 위치한 므디나(Mdina)이다. == 중세 ==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 6세기 [[동로마 제국]]이 다시 섬을 점령했으나 이후 사라센 해적들의 공격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서기 870년에는 아랍 무슬림 [[아글라브 왕조]]에 점령당했다. 이후 많은 아랍인들이 해적 기지 삼아 섬에 정착했으나 1091년 [[시칠리아]]의 노르만인들이 몰타를 점령하고, 섬 주민들을 다시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러나 고대 [[페니키아어]]와 [[아람어]]를 사용해오던 몰타 주민들은 기독교 개종 이후에도 스페인/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의 경우와 다르게 일상 생활에서 한동안 계속 아랍어를 사용했다. [[페니키아어]], [[아람어]]와 마찬가지로 [[아랍어]]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 속했고, 아랍어가 별 이질감 없이 중세 몰타인에 문화에 융화되었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심지어 종교마저 바뀌어도 언어의 변화가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몰타어]] 문서 참조 == 근세 == 1522년에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1520~1566)가 로도스 섬을 정복하자 그 섬에 자리잡고 있던 [[구호기사단]]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했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인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1516~1556)가 1530년에 기사단에게 매년 [[매(조류)|매]](hawk) 1마리를 공물로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몰타를 사실상 무상 증여했다. 이 때부터 몰타는 성 요한 기사단의 영토가 되었다.[* [[몰타의 매]]가 이것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몰타 기사단]]은 이 곳을 거점으로 과거 로도스 시절을 잊지 않고 사라센 선박과 [[해적]]선 모두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이들이 자리잡은 몰타 섬은 북아프리카의 항만과 항로들을 기습하기 최적화된 곳이라서 [[오스만 제국]]을 곤란하게 했다. 결국 술레이만 1세는 1565년 몰타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2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지만 세 달에 걸친[* 정확히 3개월 3주 3일동안 계속되었다. 최후의 기독교 기사단의 항전이었다는 것 때문에 현재 서구권에서는 몰타 공방전을 'Great Siege'로 칭한다.] 공방전 끝에 함락에 실패한다. 당시 방어 병력은 기사단원 500~600 명에 현지 징집병과 전투 직전에 고용한 용병 등을 포함한 6~8천 명 정도였다.[* 이후 스페인령 시칠리아에서 8천여 명의 지원병을 파병해주기는 했는데, 이들은 공방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도착했다. 지원 부대는 조기에 소집되었으나, 함대 손실을 우려한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가 병력 수송을 제지했다.] 이 승리로 기사단은 명성이 유럽에 퍼져, 몰타의 지명도도 올라갔다.[* 공방전 당시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앞장서서 싸운 기사단장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는 공방전이 끝난 후 요새를 복구하고 증축하였다. 그리고 본래의 수도 므디나가 공격에 취약하다는 단점을 들어 새로운 수도를 만들 계획까지 세웠고 토목 작업의 토대가 될 주춧돌을 놓는 작업까지 직접 마친 뒤 죽었는데, 이 도시가 바로 현재 몰타의 수도 '발레타'다.] 몰타 공방전 이후 기사단에 입단하는 지망자도 늘어나고, 스페인의 지원을 받는 교황령을 위시로 한 가톨릭 국가들의 기금 원조도 늘어나 기사단은 사라센 해적과 상선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몰타 기사단]]의 활동은 17~18세기에도 계속되었다. == 근대 == 19세기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가는 과정에서 기사단의 항복[* 기독교도와는 싸우지 않는다는 기사단의 원칙에 따라, 오스만과의 항전과는 다르게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다.]을 받아내서 점령 직후 기사단은 몰타에서 퇴거한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의 요청으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몰타를 점령했다. 이후 [[빈 회의]](1814~1815)의 결과 몰타의 영국 영유가 승인되어 몰타는 영국 영토가 되었다. 다시 쫒겨난 기사단은 교황령이 받아주어 로마로 망명해, 이 때부터는 무력 사용을 포기하고 본업인 구호 사업에 충실하게 되었다.[* 구호기사단은 지금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다.] == 현대 ==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과 이탈리아가 북아프리카를 원정하면서 지원하기 위한 보급 루트도 중요해졌는데, 몰타의 위치가 세로로는 시칠리아-트리폴리의 [[독일군]], [[이탈리아군]]의 보급선 한가운데였고, 또 가로로는 지브롤터-알렉산드리아의 영국의 보급선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몰타를 점령하는 쪽이 자신의 보급로를 확보하고 반대편의 보급로를 끊어버릴 수 있는 엄청나게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추축군은 '허큘리스 작전'으로 엄청난 공군력을 쏟아부어 [[몰타 항공전|몰타 전역을 연일 폭격했다]]. 크지도 않은 섬을 하도 폭격을 해대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폭격당한 곳'라는 소리를 듣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영국은 본토를 제외하면 최초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주둔시키는 등 계속해서 몰타의 전력을 증강했으며 그 덕분에 독일은 몰타를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물론 큰 피해를 감수하고 처리할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 주축이 될 [[공수부대]]가 크레타 섬에서 엄청난 피해를 내면서 성공을 거뒀기에 효용성이 없다고 판단해 방치했다. 결국 이로 인해서 이탈리아군의 보급선이 완전히 끊겨버려 북아프리카에 주둔한 이탈리아군과 독일군 모두 전멸하는 결과가 만들어졌다. [[1964년]] 몰타국([[영어]]: State of Malta, [[몰타어]]: Stat ta' Malta)이라는 이름으로 [[영연방 왕국]]에서 독립하였다. 몰타국은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를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국]]이었으나, [[1974년]]에 헌법을 개정해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국호 역시 몰타 공화국(Republic of Malta, Repubblika ta' Malta)으로 변경되었다. [[1989년]], 몰타에서 [[냉전]]의 종말을 확정한 [[몰타 회담]]이 열렸다. [[독립]] 40주년을 맞은 [[2004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2004년은 [[유럽연합]]에 새로 가입한 국가 수가 가장 많은 해기도 하다. 몰타를 포함해 무려 10개국이 이 해에 가입했다.] [[분류:몰타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