慕容部 [목차] == 소개 == [[선비족]]의 집단 중 하나로 [[랴오허|요하]] 유역에 거주했다. [[위(삼국시대)|위나라]] 때 건국되어 위나라에게 복속되었으며, [[서진]] 때 중국을 공격했다가 크게 패해 [[모용섭귀]]가 사망하면서 [[모용외]]가 [[모용내]]에게 찬탈을 당했다가 다시 회복하는 등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싸움이 벌어졌다. 285년부터 서진의 변경을 침입하기 시작했다가 서진이 이를 막아내 패했으며, 그 대신 [[부여]]를 공격해 도성을 함락시키는 등 요동과 만주 쪽으로 세력을 떨쳤다. 참고로 모용부의 부여 침공은 '''역사상 가장 오래 된 한민족과 북방 유목 민족의 충돌이다.'''[* 모용선비의 부여 침략부터 시작해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무려 1300여 년이 넘는 한민족과 북방 민족간의 질긴 악연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그러나 또 다른 선비족 부족인 [[우문부]], [[단부]]가 강성해 그들의 공격을 받을 정도라 그들에게 선물을 주며 섬겼으며, 매번 서진의 요서 지역에 쳐들어왔다. 302년에 [[우문부]]의 공격을 막아냈고, 또 서진에서 [[팔왕의 난]], [[영가의 난]] 등이 일어나 크게 혼란해져 많은 유민들이 발생하자 이들을 흡수하여 세력이 강해짐에 따라 모용외가 선우를 자칭할 정도가 되었다. 강성해진 모용부는 단부를 약탈하고 [[고구려]], 후조,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 등에 맞서 싸웠다. 성장하는 모용선비를 저지하기 위해 서진 평주자사 [[최비]]는 [[고구려]] [[미천왕]]과 [[우문부]], [[단부]]를 설득하여 319년 연합군을 결성해 모용부의 수도 극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모용외]]는 극성에서 문을 닫고 지킨 채로 사자를 파견해 소고기, 술을 우문씨에만 주자 고구려, 단부 등에서는 우문부와 모용외가 모의하고 있다고 의심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결국 우문부만 남아 단독으로 공격했지만 대패했고, 우문부를 이끌던 [[우문실독관]]은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한편 모용외가 모용부의 세력을 대대적으로 일으켰지만 모용부의 권력경쟁에서 밀린 [[모용토욕혼]]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멀리 서역으로 이주해 [[토욕혼]]을 건국했다. 333년에 모용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모용황]]이 왕으로 즉위하여 [[전연]]이 건국되었다. 전연 이후로는 토욕혼을 제외하고 모용부가 세운 국가들이 쇠퇴할 때마다 후연, 서연, 남연 등이 차례로 세워졌으나, 남연은 410년에 [[유유(송무제)|유유]]에게 멸망되었고, 후연은 407년 멸망했으며, 토욕혼은 7세기 후반에 [[토번]]에게 멸망당한다. '풍요롭다' 혹은 '많다'라는 뜻을 가진 몽골어 [[바얀]]이 선비족 모용부에서 '모용'의 원음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 모용부 소속 인물 == '''모용부가 세운 국가의 인물들은 제외''' * [[막호발]] * [[모용내]] * [[모용목연]] * [[모용섭귀]] * [[모용외]] * [[손정#s-2|손정]] * [[양탐]] * 을나루풍(乙郍婁馮) - 모용부의 인물. 모용외의 장사로 을나루가 성이고 모용토욕혼이 모용외와 다투어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옮기자 사신으로 파견되어 모용토욕혼에게 사과했다. [[분류:모용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