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MauricePialat.jpg]] Maurice Pialat [[1925년]] [[8월 21일]] - [[2003년]] [[1월 11일]] [목차] == 소개 == [[프랑스]]의 [[영화 감독]]. 프랑스 영화계에서 이질적이며 [[풍운아]]적인 삶을 살다 간 감독으로 꼽힌다. == 이력 == 1920년 [[로베르 브레송]]처럼 퓌드돔 주 출신으로 [* 후술하겠지만 브레송하고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자전적 영화인 [[벌거벗은 유년]]에서 밝혔듯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가정 따윈 신경 쓰지도 않는 술주정뱅이 난봉꾼이었고 어머니는 삶에 찌들어 있어서 그다지 사랑받지 못했다고. [[벌어진 입]]은 어머니의 죽음을 다룬 자전적 영화다. 원래는 화가였다.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했다고 하며 [* 훗날 진짜로 반 고흐 전기 영화를 찍기도 한다.], 명문 미술대인 [[국립장식미술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해 다녔을 정도로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인기 없는 화가로 지내다가 미술을 포기하고 한동안 막노동 생활을 했다고 한다. 피알라 특유의 거칠고 냉소적인 성향이 어디서 짐작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세대를 보면 알겠지만, [[누벨바그]] 세대랑 동갑이며 영화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다. 단편 영화도 몇 편 찍어 주목받기도 했고 [[클로드 베리]] 같은 누벨바그 영화계 인사랑 교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편 영화를 찍은건 [[누벨바그]] 열풍이 다 지나간 1960년대 말이었다. 심지어 성향도 누벨바그랑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프랑소와 트뤼포]]가 데뷔작 프로듀싱을 해주긴 했지만, 정작 피알라는 트뤼포 영화를 싫어했다. 데뷔작 [[벌거벗은 유년]]을 만든 뒤 [[400번의 구타]]의 연출론을 디스하는 영화라고 자인하기도 했다. 되려 나중엔 트뤼포랑 사이가 안 좋았던 [[장 뤽 고다르]]랑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데뷔작 [[벌거벗은 유년]]을 찍은 후 독립 제작사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비슷하게 포스트 누벨바그 감독으로 꼽히는 [[장 외슈타스]]가 두 편을 남기고 자살했다면, 피알라는 힘들게 영화를 만들었다. 늦깎이로 데뷔한데다 만드는 속도도 느려서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고 영화 흥행이 잘 안되었던 편. 80년대부터 흥행 성적은 나아지긴 했지만, 비평가들도 적대적이어서 [[사탄의 태양 아래서]]는 역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중 논쟁적인 수상작을 꼽으라면 항상 꼽힌다. 1995년 유작 [[르 가르슈]]를 찍은 뒤, [[신부전증]] 투병을 하다가 2003년 타계했다. == 성격 == 불우한 유년 시절, 힘든 제작 과정 등을 이유로 자의식이 강하고 독불장군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언론이나 비평가들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들에 대한 불만을 딱히 숨기지도 않았던 편. [[사탄의 태양 아래서]]의 황금종려상 수상에 불만을 품은 관객들을 향해 주먹을 들어올리며 “당신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당신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했던 일화는 상당히 유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객들 반응과는 정반대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 수상이 결정됐다.] 사후엔 그나마 재평가가 이뤄진 편. 이런 성격은 촬영장에서도 배우들과 자주 충돌을 일으켰는데, [[소피 마르소]]가 [[경찰]]을 찍을때 있었던 정신적 학대가 가장 유명하다. 당시 소피 마르소는 거의 울뻔했다고. 여성 관계가 복잡했다. [[룰루(영화)]]는 각본가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으며, 마지막 부인인 실비 피알라 [* 결혼 전 성은 당통. 모리스 사후에도 여전히 영화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모리스 타계 이후로는 [[알랭 기로디]]랑 협업이 유명하다.]는 불륜 관계로 시작했다. == 작풍 == 데뷔전까지는 그렇게 많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하며 독자적인 성향을 지녔던 걸로 유명하다. 서사 자체가 무덤덤하고 건조하게 진행되며, 엄격한 [[형식]]을 갖춘 [[자연주의]] 영화를 만들었다. 여기다 장식을 다 빼버린 밋밋한 [[미장센]]도 특징. 전반적으로 [[존 카사베츠]]의 영향이 강하지만 카사베츠랑 달리 회화적인 엄격함도 자주 보인다. [* 카사베츠는 다큐멘터리의 영향을 받아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을 이용한 생동감 넘치는 화면을 선보였다. 피알라는 반대로 주로 카메라를 세워서 찍었다.] 몇몇 영화는 대놓고 미술사조를 인용해 영화를 만들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폴 세잔]], [[툴루즈 로트렉]] 등 당시 [[인상주의]] 화풍을 그대로 가져와 적용시킨 [[반 고흐]]가 대표적. [* 정작 고흐 화풍은 제한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게 아이러니.] [[로베르 브레송]] 언급도 자주 되는 편. 실제로 둘은 퓌드돔 출신으로 화가에서 출발해 영화계에 입문했으며 과묵하고 비관적인 영화로 유명해졌으며, 조르주 베르나노스 소설로 영화를 만든 바 있다. 내용면에서는 냉소적이고 [[현시창]]스러운 경향이 강하다. 도덕의 문제라던가 생로병사의 추함, 인간 욕망의 너저분함, 관계의 무용, 사랑에 대한 냉소 등 불편한 소재를 거리낌없이 사용했다. 한국으로 따지면 [[김기덕(1960)|김기덕]]과 포지션이 유사하다. 김기덕과 달리 극단적인 폭력과 섹스를 등장시키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화가 출신, 하층 계급의 삶과 욕망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 냉소적이고 현시창적인 내용, 자의식 강한 성격, 고립적인 영화 스타일로 영화계에서 배척받았다는 점 등이 어느 정도 겹친다. [[제라르 드파르디유]]와 [[상드린 보네르]]가 [[페르소나]]였다. 특히 보네르는 피알라가 발굴한 배우로 이후 몇번 협업을 하기도 했다. [[분류:프랑스 영화 감독]][[분류:1925년 출생]][[분류:200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