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센고쿠 시대/인물]] [[분류:임진왜란/군인]][[분류:1579년 출생]][[분류:1650년 사망]][[분류:다이묘]] [목차] == 개요 == 毛利秀元 [[1579년]] [[11월 7일]] ~ [[1650년]] [[10월 3일]]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 나가토 [[조후번]](長府藩) 초대 번주 == 생애 == 1579년 11월 7일 [[호이다 모토키요]][* [[모리 모토나리]]의 4남]의 차남으로 빗츄국(備中国) 사루카게성(猿掛城)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宮松丸 1584년 형 宮鶴丸가 12세의 나이로 병사했기 때문에 모토키요의 적남되었지만, 1585년에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던 사촌 형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가 되었다. 1590년 겐푸쿠[* 元服 - 일종의 성인식]를 치르고, 1592년 4월 11일 히젠국(肥前国) 나고야성(名護屋城)으로 향하던 중 히로시마성(広島城)을 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면회, 데루모토의 양자가 된것을 인정받고 히데요시에게 히데(秀)라는 글자를 받아 이름을 히데모토로 고친다. 1592년 [[임진왜란]]때는 데루모토와 함께 [[조선]]으로 출진, 1593년 6월 [[우키타 히데이에]], 백부(伯父)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 했다. 1595년 양부(養父) [[모리 데루모토]]가 친아들을 얻어 모리 가문의 가독 상속을 고사하였으며, 같은 해 2월 히데요시의 양녀[*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딸] 혼인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떄는 병중인 [[모리 데루모토]]를 대신해 모리 가문의 3만 군대를 지휘하는 우군(右軍)의 총대장이 되어, 사촌 형 [[킷카와 히로이에]]와 함께 참전한다.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조선의 황석산성을 함락 시켰으며, [[직산 전투]]에서는 [[구로다 나가마사]]를 돕기도 했다. 1599년 나가토국(長門国) 전체와 스오국(周防国)의 요시키군(吉敷郡), 그리고 아버지 모토키요로부터 상속받은 아키국(安芸国)의 사에키군(佐伯郡)을 합한 총 17만석의 영지를 가진 독립된 [[다이묘]]가 되었다. 다만 아직 히데모토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안코쿠지 에케이]]가 [[후견인]](後見人)이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모리 가문의 당주 [[모리 데루모토]]가 서군(西軍)의 총대장이 되어 [[오사카성]]에 있었기 때문에, 데루모토의 대리인 자격으로 히데모토가 모리군을 이끌고 세키가하라로 향했다. 하지만 같은 서군(西軍)으로 참전한 사촌 형 [[킷카와 히로이에]]는 이미 동군(東軍)의 총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었으며, 킷카와군은 히데모토의 모리군이 도쿠가와군을 공격하지 못하게 길을 막는 방해까지 하였다. 결국 히데모토와 모리군은 전투를 방관할수밖에 없었고 종래에는 전장에서 이탈해 버렸다. [[세키가하라 전투]]후 [[오사카성]]으로 퇴각한 히데모토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함께 데루모토에게 철저한 항전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종가(宗家)인 모리 가문은 [[킷카와 히로이에]]의 내통[* 모리 가문의 영지 보존 약속 등]에도 불구하고 영지를 대폭 삭감 당했으며, 히데모토의 기존 영지는 모리 종가(宗家)의 영지가 되어버렸다. 히데모토는 기존 영지 대신 나가토국(長門国)의 오사군(厚狭郡), 토요우라군(豊浦郡) 2개 군(郡) 6만석의 영지를 할양 받고, [[조슈번]](長州藩)의 지번(支藩)[* [[에도시대]]때 번주(藩主) 가문의 일족 및 유력 가신 등에게 영지를 분배해 만든 번(藩)]인 [[조후번]](長府藩)의 초대 번주가 된다. 데루모토의 신임을 얻어 종가(宗家) [[조슈번]](長州藩)의 정무를 총괄하기도 했다. 1609년 정실부인이 사망, 1613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와 혼인하였으며, 같은 해 아직 나이가 어린 [[조슈번]](長州藩)의 후계자 [[모리 히데나리]][* [[모리 데루모토]]의 장남]의 [[후견인]](後見人)이 되었다. 1614년부터 1615년까지 있었던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에도 막부]](江戶幕府)로부터 신뢰를 얻는데 진력하였다. 1616년부터 [[모리 히데나리]]의 대리로서 막부와의 절충을 담당하고, 1625년부터 1632년까지는 [[조슈번]](長州藩)의 [[검지]]를 시행하여 [[석고]]를 증가시키는 등 번정(藩政)을 총괄하여 [[조슈번]](長州藩)의 기초를 다졌다. 1630년 종가(宗家)의 당주 [[모리 히데나리]]와 갈등이 생기게 되는데, 히데모토의 종주권(宗主権) 주장과 히데모토의 적남인 [[모리 미츠히로]]와 히데나리의 딸과의 혼담이 깨진게 원인이 되었다. 히데모토는 후견역(後見役)을 사임하고, [[조슈번]](長州藩)이 [[에도성]](江戸城) 수리 공사에 동원 되었을적엔, 히데나리의 도와달라는 요청도 거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에도 불화는 깊어져 1634년 [[모리 데루모토]]의 차남이자 히데나리의 동생인 [[모리 나리타카]]가 [[조슈번]](長州藩)으로부터 독립을 획책하자, 히데모토는 나리타카를 도우려는 모습을 보인다. 히데나리는 종가(宗家)를 가벼이 여기는 히데모토의 행태에 격노하여 히데모토를 처벌하려 하였으나, 오토기슈[* [[높으신 분들]]의 말상대 역]직에 있던 히데모토가 [[에도 막부]](江戶幕府)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와 친밀한 관계였기에 처벌하지 못하였다. 1636년 막부(幕府)의 중재로 히데나리와 화해하게 된다. 1650년 에도에서 사망했다. 항년 72세. 가문은 차남[* 장남인 미야마츠마루(宮松丸)는 어릴적 사망]인 [[모리 미츠히로]]가 이었다. 3남인 [[모리 모토토모]]는 후에 [[조후번]](長府藩)의 지번인 [[키요스에번]](清末藩)을 세운다. == 여담 == 완력이 강해서 바둑판 위에 사람을 세우고 그것을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조슈번]](長州藩)의 5대 번주 부터 13대 번주까지는 모두 [[모리 히데모토]]의 후손들이다. 1대 번주 부터 4대 번주, 마지막 번주인 14대 번주는 [[모리 데루모토]]의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