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룩셈부르크 대공)] ||<-2><table align=center><tablewidth=500> [[파일:Marie-Adélaïde,_Grand_Duchess_of_Luxembourg_2.jpg|width=100%]] || || '''이름''' ||마리 아델라이드 테레지아 일다 빌헬미나[br](Marie Adélaïde Theresia Hilda Wilhelmina)|| || '''출생''' ||[[1894년]] [[6월 14일]][br][[룩셈부르크]] 콜마르베르크 베르크 성|| || '''사망''' ||[[1924년]] [[1월 24일]] (29세)[br][[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 렝그레스 호헨부르크 성|| ||<|2> '''재위''' ||<#E7E7E7>[[룩셈부르크]]의 여대공|| ||[[1912년]] [[2월 25일]] ~ [[1919년]] [[1월 14일]]|| || '''아버지''' ||[[기욤 4세]]|| || '''어머니''' ||[[포르투갈]]의 [[https://en.wikipedia.org/wiki/Infanta_Marie_Anne_of_Portugal?wprov=sfla1|마리 안]]|| || '''자매''' ||[[샤를로트(룩셈부르크)|샤를로트]][br][[https://en.wikipedia.org/wiki/Princess_Hilda_of_Luxembourg_%281897%E2%80%931979%29?wprov=sfla1|힐다]][br][[https://en.wikipedia.org/wiki/Princess_Antonia_of_Luxembourg?wprov=sfla1|안토니아]][br][[https://en.wikipedia.org/wiki/Princess_Elisabeth_of_Luxembourg_%281901%E2%80%931950%29?wprov=sfla1|엘리자베트]][br][[https://en.wikipedia.org/wiki/Princess_Sophie_of_Luxembourg?wprov=sfla1|소피]]|| [[룩셈부르크]]의 여대공. '''Marie Adelheid Thérèse Hilda Wilhelmine vu Lëtzebuerg''' 1894.6.14. - 1924.1.24. (재위 1912.2.25. - 1919.1.14.) [[기욤 4세]] 대공과 [[포르투갈]] 출신 마리 안 대공비의 장녀로 태어났다. 본래 룩셈부르크는 [[살리카법]]이 적용되어 여성이 대공위를 계승할 수 없었지만, 룩셈부르크의 남계 후손이 단절된 상황에서 아버지 기욤 4세가 딸만 여섯(...)을 두었을 뿐 아들이 없었기에[* 정확히 말하면 남계 후손이 있기는 했으나 [[귀천상혼]]으로 태어나 대공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1907년에 후계자[* 추정상속인의 신분이라도 대공세녀를 의미하는 Hereditary Grand Duchess of Luxembourg에 봉해졌고 남동생이 태어날 가능성 따윈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확정속인이었다.]로 세웠다. 1912년 기욤 4세가 서거하자 17살 6개월 나이에 룩셈부르크 역사상 첫 여대공이 되었으며, 아울러 맹인왕 장[* 1296년에 태어나 1346년, 백년전쟁 초기에 있던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한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의 보헤미아 국왕으로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의 아버지이자 역시 신성 로마 황제였던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이었다. 보헤미아 왕을 겸했기 때문에 '''보헤미아의 얀 (요한)'''으로 더욱 유명하다. 여담이지만 이 사람의 장남이던 [[카를 4세]]는 보헤미아의 왕위를 물려받고 차남은 룩셈부르크를 물려 받았는데[* 정확히는 룩셈부르크 역시 카를이 물려 받았으나 룩셈부르크 백작령을 자신의 동생에게 물려준 뒤 약 1년 후, 공작령으로 승격시켰다.] 그 차남이 바로 룩셈부르크 '''공국'''의 초대 군주, 벤첼 1세이다.] 이후 600년만에 룩셈부르크 땅에서 태어난 룩셈부르크 군주였다.[* 룩셈부르크가 다른 국가와 [[동군연합]]을 길게 가지는 바람에 600년 동안 룩셈부르크의 군주들은 [[체코|보헤미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펠리페 5세|심지어는]] [[프랑스]][[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까지]] 굉장히 다양한 곳에서 태어났다.] 즉위 당시 미성년자여서 4개월 동안은 모친이 섭정하였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점령군에 친화적인 듯한 행보로 민심을 크게 잃었으며 연합국인 [[프랑스]]와 [[벨기에]]로부터는 상종도 안 하겠다는 식으로 노골적인 압박을 받았다. 일부 의회 의원들이 반기를 들고, 폭동까지 일어나자 결국 의회의 건의에 따라 군주제를 지키기 위해 1919년 1월 14일 동생 [[샤를로트(룩셈부르크)|샤를로트]]에게 양위하였다. 미혼으로 자녀가 없었기 때문. 양위한 후 이탈리아의 수녀원으로 들어갔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환속하고 [[인플루엔자]]로 1924년 1월 24일 향년 29세로 독일에서 사망한다. [[분류:룩셈부르크 여대공]] [[분류: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 [[분류:1894년 출생]] [[분류:1924년 사망]] [[분류:퇴위한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