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표절/심플, version=14, source=한국어 위키백과)] ||<-5><tablealign=center>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 ||<width=30%> 서울특별시 함락 || {{{+1 ←}}} ||<width=30%> '''리승엽''' || {{{+1 →}}} ||<width=30%> [[9.28 서울 수복]] || 李承燁 [[1906년]] [[2월 8일]][* [[1905년]]이라고 하는 자료도 있으며, [[http://db.history.go.kr/id/ia_3976_3084|192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와 [[http://db.history.go.kr/id/ia_3977_3084|1928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6년 2월 8일생으로 기재되어있다. 허나, [[http://db.history.go.kr/id/ia_3978_3084|193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와 [[http://db.history.go.kr/id/im_108_03116|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1908년]] [[2월 9일]]생으로 되어 있어 무엇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 [[1953년]] [목차] == 개요 == [[북한]]의 [[정치인]]이자 언론인. [[조선공산당]] 창설에 관여했으며 [[조선로동당]]의 초대 정치 위원이자 [[박헌영]]의 최측근이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애매한 게, 리승엽과 [[박헌영]] 모두 전쟁이 한창이었던 53년 3월에 체포되었다. 종전까지 4달이 남은 상태였기에 전쟁 중 총살당한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박헌영]] 등과 같이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이명은 이양경(李良敬). == 생애 == [[경기도]] [[화성시|남양군]] 영흥면 외동(현 [[인천광역시]] [[옹진군(인천)|옹진군]] 영흥면 외리)에서 아버지 이기선(李夔善)과 어머니 전씨(田氏)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기선은 [[뱃사공]]이었으나 이후 [[인천]]으로 이주하여 [[여관]]을 경영한다. 2~30년대 일제의 요시찰 인물 감시 카드에 따르면, 부친의 [[부동산]]과 [[동산]]이 약 2만 원 상당에 이를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어린 시절 크게 부족함 없이 자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북한]]에서는 소[[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하면서 '출신부터 반혁명적인 인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 속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인사들 중 부르주아 출신들이 꽤 된다. 당장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던 [[블라디미르 레닌]]이 아버지가 교육장학사 출신이였고, 동료이자 라이벌 [[이현상]]도 아버지가 부농에 면장까지 지낸 지역 유지였다.] [[인천고등학교|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등에는 [[1919년]] [[3.1운동]] 가담으로 퇴학 당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그와 관련된 기록에서는 그가 '졸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도쿄]]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하지만, 입학한 당해[* 기록마다 연도가 다르다. [[1921년]] 혹은 [[1922년]]에 입학했다고 한다.] 7월에 퇴학당한다.[* 퇴학 사유는 알 수 없다.] 이후 보성법률학교에 들어가지만 [[1923년]] 2월 중퇴한다. 이 무렵에 그는 [[사회주의]]에 심취하였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한다. 중퇴 이후에는 [[인천]]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도 하여 가정도 꾸렸으며,[* 부인의 이름은 '신간난'이라고 한다.] [[동인천역]] 맞은 편에 있던 인천미곡상조합의 사무장으로 일했다.[* 리승엽이 인천미곡상조합에서 일할 때 2~3분 거리에 [[조봉암]]이 운영하던 비강조합이 있었고, [[인천]]의 [[사회주의]] 운동 핵심에 있었던 박남칠이 그 옆에서 쌀 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리강국]] 등 [[서울]]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자주 오가기도 했다. 훗날 이러한 인연이 시작이 되어 [[광복절]] 이후 [[인천]]의 미곡상들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 지부의 핵심 인원이 된다.] [[1925년]] [[조선일보]] [[인천]] 지부 기자로 일하였다. 한편 그는 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하여 [[인천]] 지부의 핵심 인물이 되었으며, [[1925년]] [[조선공산당]]에 창건에 관여한다. 이로 인해서 그런지 그는 [[1926년]] [[조선일보사]]에서 [[권고사직]]당했으며, 이후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다. 2년 가량 감옥 생활 이후 그는 계속해서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다. [[1930년]] [[3.1운동]] 11주년 기념으로 '전조선 피압박 피착취계급에 격함'이라는 격문을 뿌린 '격문사건' 주도자로 수배당했지만, 그는 도주에 성공하여 검거되지 않았다.[* 당시 격문사건 재판부에서는 격문사건으로 체포된 6명에 대해서만 형을 집행하였고, 리승엽을 포함하여 체포되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는 기소중지 처분을 내렸다.] 이후 그는 영남 지역에서 노동 생활을 하며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1932년 이른바 '반제격문사건(반제사건)'으로 체포된다. 이는 [[만주사변]]과 관련하여 반제국주의 반전 격문을 뿌린 사건으로, 대범하게도 당시 [[진주시|진주]]와 [[부산광역시|부산]]에 있던 [[일본군]] 주둔지에도 이 격문을 뿌렸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부산]] 재판소에서 징역 4년을 구형받는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따르면, 부인과 어린 자식이 [[인천]]에서 [[부산]]까지 와서 징역을 선고받는 공판을 참관했다면서, 처자식이 불쌍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석방된 후에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으로 감옥을 들락날락했다. 그리고 [[1940년]] 전향서를 쓰고 출소한다.[* 당시 일제는 무조건 사회주의자들에게 전향서를 강요했고, 수감 중이었던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전향서를 썼다. 그 가운데에는 제법 늦은 축에 속하는 편이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정말로 [[사회주의]]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전향]]한 사람도 있었고, 겉으로는 [[전향]]한 척하면서 다시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경우도 있었다.] 이후 그의 평가에 대해서는 엇갈린다. 석방된 이후에 과거 미곡상조합에서 일했던 경력 때문인지 일제의 식량배급조합 이사로 있었고, 친일적인 글도 다수 썼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는다.[* 이로 인하여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위장된 것이며 비밀리에 [[사회주의]] 운동[* [[함경도]]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 지하 조직에 관여했다고 한다.]을 벌였다고 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는 1945년 봄 [[조선건국동맹]] 결성에 관여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조선공산당 결성에 가담하여 중앙위원에 오른다. 당시 [[남로당]]에서는 [[박헌영]] 다음의 사실상 2인자 위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즈음에 월북했으며,[* [[박헌영]]의 지시였다고 한다.] [[북한]] 정권 수립 후에는 사법상에 임명되는 등 요직에 앉았다. [[1949년]]에는 [[박헌영]]과 함께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조선인민유격대]](이른바 [[빨치산]])의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6.25 전쟁]] 당시에도 총괄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53년]] '정권 전복'과 '미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물론 실제로 간첩 행위를 했다기보다는, 사실상 [[김일성]]의 정적 제거에 가깝다. 당장 전쟁 당시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서울시 인민위원장([[서울특별시장]] 격)으로 활동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도 패잔병을 모아서 유격전과 지연전을 펼치다가 후퇴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일하게 UN군 및 국군과 대치했으며, 김일성과 장교들이 평양을 버리고 도망갈 때도 끝까지 전선을 지켰다고 한다. 고향이 인천이라서 인천 지리에 밝았고 이로 인해 UN군과 국군을 상대로 인천에서 2주일이나 개길 수 있었다. 결국 2주일만에 숫적열세로 털리고 후퇴했으며 리승엽이 후퇴하자 서울은 수복되었다. 전쟁을 일으켰지만 무력 통일은 고사하고 북한 전역이 폐허가 된 채로 정전협정이 체결됐기 때문에, 김일성 입장에는 이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서 리승엽을 시작으로 남로당 인사들은 '정권 정복 음모 및 미제 간첩' 혐의로 숙청당했다. 그리고 1955년경 최종적으로 박헌영이 처형되면서 북한에서 남로당계 세력은 사실상 소멸한다. 현재는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인물이다.[* 박헌영은 그나마 민주화 이후 거물 독립운동가로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리승엽은 독립운동가로서 그렇게 큰 실적도 없고 전쟁에 참여해 빨치산 활동까지 했으므로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비판을 듣고 있다.] == 여담 == * 야구선수 [[이승엽]]과 한자가 동일하다.~~[[국민타자|인민타자]]~~ --[[그란도시즌|그란도숙청]]--[* 야구선수 [[이승엽]]은 [[광주 이씨]]이다.] * 燁이라는 한자가 일본에서 자주 쓰이지 않아 어려워서 그런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엽' 부분만 가타카나로 표기한 '李承ヨプ'란 표기가 표제어로 되어있다. [각주] == 관련 문서 == * [[북한/인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승엽(동명이인), version=15)] [[분류:조선로동당 비서]][[분류:기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언론, 출판]][[분류:옹진군(인천) 출신 인물]][[분류:1906년 출생]][[분류:1953년 사망]][[분류:나무위키 북한 프로젝트]][[분류:전주 이씨 양녕대군파]][[분류:전쟁범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