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북한의 음악가)] [[파일:리면상.jpg]] 李冕相~~니면상~~ 1908년 4월 8일 ~ 1989년 6월 25일 [목차] == 소개 == [[일제강점기]]/[[북한]]의 작곡가. == 생애 ==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태어났고 고향에서 2년제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원산시|원산]]의 제1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음악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라남도]]로 근무지를 옮겼는데 1929년에 있었던 [[광주학생항일운동]] 때 인근 벌교에서 열린 노동조합 총회에서 반일 관련 사상을 유포했다는 이유로 해직당했다. 1931년에는 [[일본]]으로 유학해 도쿄음악학교 고등사범부에서 2년 동안 배웠고 이 시기에 [[사회주의]] 계열의 음악 단체인 일본무산계급음악동맹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일본 폴리도르 레코드의 조선 지사에서 '청춘을 찾아서'등의 유행가와 '울산아가씨'[* 단 이경주가 작곡가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전쟁]] 후 작곡가 불명의 울산 지방 민요처럼 불렸지만, 1990년대 후반에 전통 민요가 아닌 작곡자가 존재하는 신민요라는 사실이 다시 공표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곡을 남기기 위해서 작곡자를 숨겼을 것이다. 이 곡이 합창곡으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김희조]]의 편곡 덕. 김희조는 자신의 책에서 이 곡의 작곡자가 있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적지 않았지만.]등의 신민요를 작곡해 취입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동안에는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조선인임을 자각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노래를 작곡했는데, [[중일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점차 맛이 가기 시작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하게 되었다. 1937년에는 일본 빅터 레코드 조선 지사 전속 작곡가가 되었고, 같은 해 '전장의 가을', '정의의 스승이여', '종군간호부의 노래'등의 친일가요를 작곡하면서 본격적인 [[일빠]] 인증을 했다. 1941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조선 음악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관제 단체인 조선음악가협회에 들어가 국민가요(=친일가요) 작곡가로 활동했고, 같은 해 발표한 '진주라 천리길'이라는 유행가가 큰 인기를 얻었다.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난 뒤에는 다시 고향인 함경남도의 중심지인 [[함흥시|함흥]]으로 돌아갔고, 함경남도 음악건설동맹 위원장으로 시작해 이듬해인 1946년에는 북조선음악건설동맹 위원장 겸 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라는 북한 문예계의 요직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시기 부터 '산업건국의 노래'와 '빛나는 조국'등 북한 체제 선전용 가요를 발표해 두각을 나타냈고, 비슷하게 친일 경력이 있던 극작가 조령출의 대본으로 [[춘향전]] 원작의 가극([[오페라]])을 작곡하고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초대 단장을 역임하는 등 초기 북한 음악계의 형성에 큰 몫을 차지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조선음악가동맹과 조선작곡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내 고향의 정든 집', '문경고개'같은 전시가요를 작곡했다. 휴전 후에도 계속 요직에 있으면서 [[김일성]] 우상화와 항일투쟁 미화 작업의 일환으로 '영광의 땅 보천보', '눈이 내린다', '우리 자랑 이만저만 아니라오', '어머니 당이여', '조국보위의 노래'등의 가요를 발표했다. 1957년에는 평양음악대학 총장 자리에도 올랐고 1986년까지 북한의 [[국회]]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직도 기수 별로 계속 역임했다. 1960~70년대에는 갓 정치계에 들어온 [[김정일]]의 움직임에 호응해 가극이나 무용극 등의 집단 창작([[문화어]]로는 집체 창작)에 동참하면서 창작 지도를 맡기도 했으며, 덕분에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 기간 동안 이루어진 문화예술계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선 뒤에는 창작 활동 보다는 기존 작품의 편곡이나 음악계 정치 활동 등에 주력했고 1989년에 [[평양]]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묻혀 있다. == 주요 수상 경력 == * 북한 공훈예술가 (1955) * 인민상 (1959. 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로 수상) * 북한 인민예술가 (1961) * [[김일성상]] (1985) == 북한의 평가 == 친일 행적이 있었음에도 성공한 예술인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같은 친일 부역자라도 [[최승희#s-1|최승희]]처럼 김일성에게 안좋게 찍혀서 숙청된 이들과 달리 별 탈 없이 잘먹고 잘산 인물이라 사후에도 계속 평가가 매우 후한 편이다. [[여담]]으로, 북한에서는 지금도 해방 후 작곡된 가요 대부분이 계속 애창되고 있고, 기악곡을 기존 노래로 [[2차 창작]] 하도록 의무화된 북한 음악계의 특성상 이런저런 노래들이 [[관현악]]이나 [[실내악]], 무용음악 등으로 계속 리메이크되고 있다. 물론 친일 관련 행적은 철저히 입막음 또는 은폐되어 있다. 덕분에 자식들도 그 빽을 입어 [[소설가]], [[인민보안부|사회안전부]] 관료, 피아니스트 등이 되어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김순남]]이 [[남조선로동당|남로당]]계라는 이유로 숙청된 뒤 그 여파로 [[결핵]]을 앓다가 죽었고, 그와 동료였던 [[이건우]]도 김순남 만큼은 아니었지만 월북 후에 [[공기#s-6|존재감이 희미했다가]] 말년에 가서야 개인 작곡집이 나오는 등의 혜택을 입은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은 삶을 살았던 셈이다. == 남한의 평가 == 당연히 음악계의 [[심영(배우)|심영]] 취급이다. 물론 친일파로 변절하기 전의 신민요나 유행가는 지금도 종종 리바이벌되고 있지만, 이후 작곡한 친일가요와 해방 후 [[월북]]해 지은 노래 대부분은 완벽한 [[빨갱이]] 인증으로 간주되어 친일파+빨갱이 라는 이유로 [[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물론 그의 지인이나 친족들 중에는 어떻게든 힘들었다는 초기의 개인사와 원만하고 올곧았다(고 하)는 성격 등을 내세우며 실드를 쳐주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원체 업적이 화려한 탓에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다만 남북 문화예술 교류가 활발했던 2000년대 초반에는 북한에서 내려온 조선국립교향악단 같은 공연 단체들이 이면상의 노래 중 '산으로 바다로 가자'와 '압록강 2천리'같이 정치적 문제가 없는 서정가요 혹은 '내 고향의 정든 집'같은 전시가요의 관현악곡 편곡을 공연하기도 했고, 동시에 이면상의 생애에 대한 재고찰도 이루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면상이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만큼, 남한에서도 대작곡가로 추앙받을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음악가]][[분류:북한의 음악가]][[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문화, 예술]][[분류:함주군 출신 인물]][[분류:1908년 출생]][[분류:198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