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table align=right><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595959><bgcolor=#595959> {{{+1 {{{#ffffff '''[[노벨상|{{{#ffffff 노벨}}}]][[노벨물리학상|{{{#ffffff 물리학상}}}]] 수상자'''}}} }}} || ||<-5><bgcolor=#ffffff>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width=200]] || ||<width=30%><height=40><rowbgcolor=#595959> [[1928년|{{{#ffffff 1928년}}}]] ||<width=5%> ||<width=30%> [[1929년|{{{#ffffff 1929년}}}]] ||<width=5%> ||<width=30%> [[1930년|{{{#ffffff 1930년}}}]] || ||<height=40> 오언 리처드슨 || → || '''루이 드 브로이''' || → || C. 라만 || ||<-2><table bordercolor=#00001b><table align=right><tablebgcolor=#ffffff> [[파일:252px-Broglie_Big.jpg|width=300px]] || ||<colbgcolor=#00001b> '''{{{#white 이름}}}''' ||'''루이 빅토르 피에르 레몽 드 브로이'''[br](Louis Victor Pierre Raymond de Broglie) || || '''{{{#white 국적}}}'''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svg|width=28]] || || '''{{{#white 출생}}}''' ||[[1892년]] [[8월 15일]][br][[프랑스 제3공화국]], 디에프 || || '''{{{#white 사망}}}''' ||[[1987년]] [[3월 19일]] ([[향년]] 94세)[br][[프랑스 제5공화국]], 루브시엔느 || || '''{{{#white 작위}}}''' ||브로이 [[공작(작위)|공작]] (Duc de Broglie)[* 英 : Duke of Broglie]. || || '''{{{#white 학력}}}''' ||[[소르본 대학교]] (학사)[* '''역사''' 학위] (1910)[br][[소르본 대학교]] (학사)[* 과학 학위] (1913)[br][[소르본 대학교]] (Ph.D) (1924) || || '''{{{#white 직업}}}''' ||[[물리학자]] || [목차] == 개요 == 제7대 브로이 [[공작(작위)|공작]] 루이 빅토르 피에르 레몽 드 브로이(프랑스어: Louis Victor Pierre Raymond de Broglie, 7th duc de Broglie, FRS, 1892년 8월 15일 ~ 1987년 3월 19일)은 양자역학의 기초를 닦은 [[프랑스]]의 [[물리학자]]이다. 1920년대 양자 역학의 개척시대에 ‘[[물질파|드 브로이 물질파]]’(파장= [[플랑크 상수]]/입자운동량)의 개념을 주창하였고, [[양자 역학]]의 입자-파동 이중성 개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제6대 브로이 공작인 형[* 형도 동생만큼 유명하진 않았으나 x-ray 연구 등에서 성과를 남겼다.]이 1960년 후계자 없이 사망한 후 제7대 브로이 공작이 된 귀족으로 현대의 과학자들 중에 가장 높은 세습 귀족의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다만 그 자신이 혼인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어, 사후 공작 자리는 먼 친척에게 넘어갔다. 당시 프랑스는 공화국이었기 때문에 귀족 제도는 없었으나, 귀족 집안의 인사가 공식 석상에서 귀족 칭호를 사용하는 것 자체는 허용했었다. 이런 관례는 1975년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이 폐지하면서 사라진다. == 물질파 이론 == [[제1차 세계 대전]] 중 [[물리학]]의 기술적 문제를 연구하고, 대전 후에 [[물리학자]]였던 형인 모리스 드 브로이 제 6대 브로이 [[공작(작위)|공작]](Maurice, 6th duc de Broglie)[* 동생이 워낙 잘나서 그렇지 모리스도 노벨상 후보에 몇 번이나 오른 뛰어난 물리학자였다.]의 연구로 자극을 받아 연구를 시작했다. 1923년 [[물질파]]의 개념에 도달하고, 다음해에 '양자론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모든 입자는 자신의 운동량에 반비례하는 파장을 지닌 [[파동]]이라는 것으로, 쉽게 말해 물질=파동이라는 것이다. 지금 들어도 황당한 이론인데 그 때야 오죽했겠는가. 다만 이 '물질이 갖는 파동으로서의 성질'의 의미는 아직 해석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이며, 제일 유명한 [[코펜하겐 해석]]에선 그 파동은 사실 '그 점에서의 물질의 발견 확률'을 나타낸다고 설명하는 정도이다.[* 여기서 주의 할 점은 '존재 확률' 이 아니라 '발견 확률' 이라는 점이다. 존재 확률이라는 단어는 "입자 등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발견 확률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영의 이중슬릿 실험에서 볼 수 있듯이 광자는 슬릿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광전 효과 실험에서 [[빛]]이 입자의 성질을 지닌다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이 개념을 역으로 생각하여 "입자도 파동의 성질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정 하에 출발하였다. 이 이론 덕분에 빛의 이중성뿐만이 아니라 물질의 이중성 역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양자 역학]]의 발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27년 데이비슨과 거머가 [[니켈]]의 결정을 이용해 행한 전자 선속의 회절 실험으로 [[전자]]에 의해 생성된 간섭 무늬 관찰을 통해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 드 브로이는 1929년 파동역학의 연구에 대한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 논문은 [[소르본 대학]]의 박사 학위통과를 위한 '''학위 청구 논문'''이었다. 그 당시 기준으로는 과학보다는 철학에 가까웠던 내용이 매우 파격적이었고 분량도 짧아서[* 물질파를 유도해 보면 알겠지만, '''고등학생도 무리없이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간단한 컨셉이다.] 심사위원들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고귀한 공작 가문 출신[* 드 브로이는 프랑스의 공작인 빅토르 드 브로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중에 군복무를 했는데 복무지가 '[[에펠 탑]]의 통신센터'... 쉽게 말하면 장군 아들이 꽃보직 맡는 거라 보면 되겠다. 다만 당시 에펠 탑이 프랑스 북부에서 가장 높은=가장 통신거리가 긴=가장 중요한 무선통신용 탑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업무강도면에서 땡보로 보긴 힘들다. 그리고, 이런 인재를 전방으로 보내서 [[헨리 귄 제프리스 모즐리|헨리 모즐리]] 꼴이 되게 했다면 인류에 큰 손실이었을 것이다.]의 논문을 퇴짜놓기 싫었던 심사위원들은 이 논문에 대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다행히 아인슈타인은 물질파 이론을 '물리학의 커다란 베일을 걷어냈다'고 높이 평가했다고 하며, 이 답장을 받은 심사위원들은 "좋아, 누가 뭐라고 하면 아인슈타인이 지지했다고 하면 되겠네. 통과시키자." 라며 논문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즉, 이 사람은 '''박사학위도 따기 전에 노벨상을 받을 논문을 쓴 것이다'''. 사실 드 브로이는 이 물질파 이론을 뜬금없이 낸 것이 아니었다. 원래 그는 문학과 역사에 관심이 있었다.[* 그의 첫번째 학위는 상술되었듯이 역사 학위이다.] 그러나 실험물리학자였던 형 모리스 드 브로이의 영향을 받아 물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던 그는 형의 실험[* 귀족의 아들답게 파리에 있는 저택에 실험장비를 잘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에서 도출된 형의 견해, '[[X선]]은 사실 물질과 파동의 복합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 전개해서 전자도 파동으로써의 성질을 가질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여 박사학위 논문으로 낸 것이다. == 수상내역 == * 1929년 노벨물리학상 * 1932년 Albert I of Monaco Prize * 1938년 막스 플랑크 메달 * 194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 1952년 유네스코의 Kalinga 상 * 1953년 영국 왕립 학회 국외회원 [[분류:프랑스의 학자]][[분류:프랑스의 귀족]][[분류:물리학자]][[분류:1892년 출생]][[분류:1987년 사망]][[분류:노벨물리학상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