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400년 출생]][[분류:461년 사망]][[분류:고대 로마/인물]][[분류:시성된 교황]][[분류:가톨릭 성인]][[분류:교회학자]][[분류:서로마 제국]][[분류:이탈리아인 교황]][[분류:성 베드로 대성당 안장자]]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로마 제국의 황제, rd1=레오 1세(로마))] [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5><#806600> [[교황|[[파일:815px-Emblem_of_the_Papacy_SE.svg.pn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45_s_leone_I.png|height=125]] || ||<width=30%> 제44대 [[식스토 3세|성 식스토 3세]] ||<width=5%> → ||<width=30%><#806600> '''{{{#FFF 제45대 성 레오 1세}}}''' || → ||<width=30%> 제46대 [[힐라리오|성 힐라리오]] || ||<-10><:><table align=center> [[파일:external/www.chiesacattolica.it/0$30082a.jpg|width=276&height=368]] || ||<-3><:> '''교황명''' ||<-9><(> 레오 1세 (Leo I) / 대 레오(Leo Magnus) || ||<-3><:> '''본명''' ||<-7><(> 레오 (Leo) || ||<-3><:> '''출생지''' ||<-7><(> [[로마 제국]] [[토스카나]] || ||<-3><:> '''사망지''' ||<-7><(> [[서로마 제국]] [[로마]] || ||<-3><:> '''생몰년도''' ||<-7><(> ? ~ 461년 [[11월 10일]][* 대체적으로는 390년 전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 ||<-3><:> '''재위기간''' ||<-7><(> 440년 [[9월 29일]] ~ 461년 [[11월 10일]] (21년 48일) || ||<-3><:> '''축일''' ||<-7><(> [[11월 10일]][* [[가톨릭]].] / [[2월 18일]][* [[동방 가톨릭 교회]], [[정교회]] ]|| * [[라틴어]]: Sanctus Leo I Magnus * [[이탈리아어]]: Papa San Leone I / Leone Magno * [[영어]]: Saint Pope Leo I / Leo the Great == 개요 == [[가톨릭]]의 제45대 [[교황]]이자 [[성인]]. '''대교황'''[* 사람에 따라 대교황을 대종(大宗)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교황을 교종(敎宗)이라고도 하므로, 대교종=>대종으로 줄인 것.]의 칭호를 받은 첫 번째 교황이며, 1754년 베네딕토 14세가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종교음악가와 합창 지휘자의 [[수호성인]]으로, 축일은 [[11월 10일]]. == 생애 == 오늘날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주 [[피사]] 근교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본토인으로, 태어난 해와 젊었을 적의 행적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것이 없다. [[연대기]]에 전해지기로는 총명하고 웅변에 뛰어났다고 한다. 431년까지 [[부제(성직자)|부제]]로서 주로 가난한 이를 돌보는 일을 하였다. 440년에 교황에 선출된 레오 1세는 교황권이 속권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교황권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면서, 이와 동시에 교리논쟁을 통해 이단자들을 축출하여 정통론을 확립했다. 443년 [[마니교]]가 [[로마 제국]]에 퍼지는 것을 알자, 반대 입장을 명확히 밝히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니교]]를 배척하라고 명하였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소아시아의 비티니아의 도시 칼케돈에서 10월 8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린 이 회의에서, [[교부]]들은 칼케돈 신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동시에 갖고 있는, 즉 참 [[하느님]]이면서 참 사람이라는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는 [[단성론]]이 동방 교회에 침투하여 서방의 로마 교회과 동방 교회가 분열될까 우려해서였다. 이 공의회로 [[삼위일체론|삼위일체]]의 교리는 [[그리스도교]] 내에 확고히 자리잡았지만, 이 과정에서 단성론파가 분리된 것은 물론 합성론을 지지한 교회들도 [[오리엔트 정교회]]로 분리되었다. === 이민족으로부터의 [[로마]] 보호 === 무엇보다 비(非) 가톨릭 신자들까지 이 교황에 대해 알려진 것은 교황의 재위 기간 중 [[훈족]]과 [[반달족]]의 침공을 받았을 때 용감히 나서 로마를 구출하여 [[교황]]의 위엄을 크게 드러낸 것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먼저, 452년 [[훈족]]이 [[서로마]] 제국을 침공하여 마침내 로마까지 이르자, 당시 [[서로마 제국]]의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교황에게 강화 중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레오 1세는 직접 로마 교외로 나가 [[훈족]]의 왕 [[아틸라]]와 회담하여 그를 말빨로 돌려 보냈는데, [[황금전설]]에 따르면, 무장이고 호위병이고 없이 시종들 몇 명과 함께 [[성직자]]의 차림으로 온 레오 1세의 양 옆에는… [[파일:external/www.wga.hu/4meetin.jpg]] 위의 그림처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칼을 들고 호위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아틸라]]가 군을 물렸다 [[카더라]]. 이러한 종교적 전설을 제외하고 일부 학자들은 '재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뒤로 슬그머니 찔러 넣으면서 협상했다.'고 보았지만, 그게 어딘가. 다소 굴욕적일 수도 있지만, 이런 것도 명백히 외교의 한 방법이다. 더욱이 이 시절 로마에는 '''이런 걸 앞장서서 할 수 있는 인물조차 없었다'''. 아틸라 또한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대패한 후 전세를 회복한 지 얼마 안 되어 전쟁을 일으켰는데, [[아퀼레이아]] 점령전 등으로 물자가 부족했고 전염병이 돌고 식량도 부족했다. 425년에 금 350파운드, 435년에 700파운드, 443년에는 2100파운드를 매년 공물로 요구하고, 따로 금 6천 파운드를 일시불로 넘기라고 요구하고 받아내었으므로 그냥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되지만, 실제 협상 내용은 밝혀진 것이 없다.[* The Rhetoric of Power in Late Antiquity: Religion and Politics in Byzantium By Elizabeth DePalma Digeser, Justin Stephens, Robert M. Frakes 70p, The Pope Vs. Attila the Hun By Charles L. Mee Jr.Ancient Rome: A Military and Political History By Christopher S. Mackay 343p] 훗날,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된 레오 1세의 석관 위쪽에는 위 장면을 [[대리석]]으로 조각한 [[성화]]가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455년 이번엔 [[반달족]]이 쳐들어오자, 교황은 또 다시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와 회담을 벌였다. 그리하여 로마 시내의 약탈은 막지 못했지만, 로마의 파괴와 시민들의 살육만큼은 막아 내었다. 오직 말빨만으로! 다시 말하자면, '''이 때는 반달족한테 찔러 줄 돈도 없었다.''' [* 사실 이건 가이세리크가 장기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딸을 황제에게 시집보내려고 하는데 로마를 불태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이때 레오 1세가 반달족의 가이세리크와 맺은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교]] 교회와 관련 시설ㆍ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2.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3. [[포로]]를 [[고문]]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로마는 그 옛날 자신이 박해하던 그리스도인에게 2번이나 구원을 받은 셈이 되었다. 이 덕분에 로마 시민들은 레오 1세에게 무한한 애정과 충성을 바쳐서, 사실상 로마의 수호자로 받아들여졌고, 이후부터 로마 교황들이 [[아비뇽 유수]] 이전까지 정치 영역에 손을 뻗치면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 수 있었다. 레오 1세는 반달족의 로마 약탈 이후인 461년 선종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아틸라 6번째(마지막) 미션에서 수도사 영웅으로 등장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