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천주교 안동교구장)] ||<-3><bgcolor=#eee8aa><tablealign=center> '''초대 [[천주교 안동교구|{{{#000000 천주교 안동교구}}}]]장'''[br] '''{{{+1 두봉[* 귀화 전 이름은 르네 마리 알베르 뒤퐁(René Marie Albert Dupont)] {{{#000000 레나도}}}}}}[* 올바른 세례명 표기는 레나토(Renatus). '[[르네]]'는 레나토의 [[프랑스]]식 변형이다.]'''[br] '''杜峰''' | '''Dupont''' || ||<-3><bgcolor=#eee8aa>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054561296.png|height=399]] || ||<|2><bgcolor=#eee8aa> '''출생''' ||<-2><bgcolor=#ffffff>[[1929년]] [[9월 2일]](만 [age(1929-09-02)]살) || ||<-2><bgcolor=#ffffff>[[프랑스 제3공화국]] [[오를레앙]] || ||<bgcolor=#eee8aa> '''국적''' ||<-2><bgcolor=#ffffff>[[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svg|width=28]] →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28]] || ||<bgcolor=#eee8aa> '''재임기간''' ||<bgcolor=#ffffff>[[천주교 안동교구|안동교구]]장 ||<bgcolor=#ffffff>[[1969년]] ~ [[1990년]] || == 개요 ==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소속의 [[가톨릭]] [[선교사]]이자 [[주교]]. 1969년부터 1990년까지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은퇴했다. == 생애 == === 한국 생활 이전 === [[파일:external/dongmun.csj.ac.kr/12433273860.jpg]]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났고, 1950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953년에는 [[성품성사|사제품]]을 받았다. 이듬해인 1954년엔 [[한국]]에 파견되었다. 1969년에는 [[천주교 안동교구]] 설정과 함께 [[주교]]로 수품되며 초대 안동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신학교]] 시절 노동사제가 되고자 생각했다. 당시에는 "[[신부(종교)|신부]]들은 해로운 존재들이다. [[부르주아]]다. 일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남의 돈을 갖는다" 라는 식의 [[공산주의자]]들의 반종교 활동이 활발했다. 이에 대하여 몇몇 신부들이 "교우들에게서 왜 생활비를 받아야 되느냐? 스스로 노동자처럼 살면 되지 않느냐?" 라는 생각으로 평일에는 노동하고 토ㆍ일요일에는 본당에서 사목하는 노동사제의 조직을 만들었다. 두봉 신학생 역시 이 문제로 지도 신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결국 "계급투쟁 등 [[공산당]]의 주장에 알게 모르게 젖어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노동사제에 대한 생각은 접었다. 대신 그는 선교사제가 되기로 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였던 [[한국]]에 파견된 것을 매우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 초대 안동교구장으로 === 2달 반 동안 화물선을 타고 [[인천항]]을 통해 전쟁으로 참화가 된 한국에 입국한 그는 [[천주교 대전교구]] 대흥동성당 보좌신부, 대전교구청 상서국장,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등을 역임한 후, 1969년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외국인 [[선교사]]는 뒷바라지만 하면 된다. 10년 간 교구 자립기반만 닦고 물러나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였다. [[유교]]적 전통이 깊은 지역에서 대화와 상호존중을 통해 선교활동에 전력했고,[* 그의 신학석사 학위논문 주제가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었을 정도로, 그는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다. 그는 "유림들은 양심에 따라 인간관계를 아주 중시하는 성격을 지녔다. 천주교회가 추구하는 것이나 나의 가치관이 잘 맞았다. 내가 부딪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고 말한다.] 특히 관할 구역 대부분이 농촌 지역이라 농촌문제와 농민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가톨릭농민회를 설립하고 농민회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상지전문대학(現 [[가톨릭상지대학교]]), [[상지여자중학교]], [[상지여자고등학교]] 등의 학교들과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다미안 의원 등을 설립하였다. 약속한 10년이 거의 다 채워져가고 이미 사임서를 제출해 두었던 무렵인 1978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이른바 [[오원춘 사건]][* 2012년에 일어난 살인 사건과는 전혀 관계없다. 요약하자면 군청에서 보급한 불량 씨[[감자]]에 항의하던 농민 오원춘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어, 모진 고문 끝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났다.]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 눈엣가시 같았던 두봉 주교에 대한 사임ㆍ추방 압력이 거세졌다. 그러나 두봉 주교는 '내가 스스로 결정해서 교구장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놓는 것과 이런 상황과는 완전히 다르다.' 라며 맞섰고, [[교황청]]에서도 '지금 사임서를 수리하면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의 두봉 주교 추방에 협력하는 셈이 된다'는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의 의견을 받아들여 두봉 주교의 사임을 철회하였다. 결국 본의 아니게, 이 사건 후에도 10여 년을 더 재직하다가 1990년 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 근황 === 그는 언제나 가난의 영성을 강조해 왔으며, 주교직을 상징하는 [[문장(그림)|문장]](紋章)과 사목표어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은퇴 후, 행여 후임 교구장에게 부담이 될까봐 [[안동교구]]를 떠나 [[경기도]] [[고양시]] 행주외동의 조립식 가건물인 행주 [[공소(가톨릭)|공소]]에서 14년간 피정 지도 등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달라는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제의에 따라, 2004년 [[경북]] [[의성군]] 봉양면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손수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이를 인근 주민들과 나누어 먹는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피정과 강의에 항상 바쁘다고. {{{#!html <iframe src="http://player.vimeo.com/video/34198850?badge=0" width="500" height="281" frameborder="0" webkitAllowFullScreen mozallowfullscreen allowFullScreen></iframe> }}} 2011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KBS]]에서는 그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기쁘고 떳떳하게"[* 사목표어를 따로 내세우지 않는 그가 마음에 담아두는 표어라고 한다.]가 방송되었다. 그외에 [[평화방송]]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인 "미션" 에도 출연하였다. 저서는 아니지만 2011년도 사순시기에 [[명동성당]]에서 했던 강론들을 모아 만든 강론집으로 내었다. 제목은 "가장 멋진 삶". 198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나폴레옹 훈장을 수훈받았으며, 2012년 제16회 [[만해실천대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2019년에는 대통령표창인 [[올해의 이민자상]]과 [[백남인권봉사상]]을 수상했다. 201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http://news.imaeil.com/SocietyAll/2019121217583845353#|기사]] [[분류:1929년 출생]] [[분류: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 [[분류:천주교 안동교구장]][[분류:대한민국으로 귀화한 인물]][[분류:프랑스계 한국인]][[분류:백인계 한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