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에도 막부/역대 쇼군)] ||<-2><tablealign=right><tablewidth=450><tablebordercolor=#fac117><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000 0%,#392f31 30%, #392f31 70%, #000)" '''[[파일:토쿠가와 가문 문장.png|height=20]] {{{#fac117 [[에도 막부|{{{#fac117 에도 막부 14대 정이대장군}}}]][br]{{{+1 とくがわ いえもち[br]徳川家茂}}}[br]도쿠가와 이에모치}}}'''}}} || ||<-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50px-Toku14-2.jpg|width=100%]] [[파일:external/www.lib.city.minato.tokyo.jp/127iemochi.jpg|width=100%]] || ||<bgcolor=#392f31> '''{{{#fac117 생몰년도}}}''' ||<(> 1846년 7월 1일 ~ 1866년 8월 29일(20세) || ||<bgcolor=#392f31> '''{{{#fac117 신체}}}''' ||156.6cm[* 151.6cm는 위패의 키이고 156.6cm하고 혈액형 A형은 유골 조사의 키하고 혈액형인데 유골 조사인 156.6cm가 신빙성이 높다.], [[A형]] || ||<|5><bgcolor=#392f31> '''{{{#fac117 재임}}}'''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392f31, #000)" '''{{{#fac117 기슈 번주}}}'''}}} || || 1849년 ~ 1858년(9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392f31, #000)" '''{{{#fac117 쇼군}}}'''}}} || || 1858년 ~ 1866년(8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에도 막부]]의 14대 쇼군. [[각기병]] 쇼군, 45kg 쇼군[* 워낙 병약한 체질이라서 일본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나온 말이다.]. [[메이지 덴노]]의 고모부. == 생애 == [[고산케]] 기슈 도쿠가와 가문의 도쿠가와 나리유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이 있었지만 1830년에 사망했다. 1849년에 기슈번의 영주를 맡던 숙부가 사망하면서 숙부의 양자로 들어가 [[기슈 번]]의 13대 번주가 되었다. 불과 3살의 나이에 기슈 번의 영주가 된 탓에 당초 은거했던 전 영주 도쿠가와 하루토미의 보좌를 받았지만 도쿠가와 하루토미가 사망한 뒤에는 가로 미즈노 타다나카가 실권을 잡아 번의 정치를 개혁하려던 다테 카즈히로([[무츠 무네미츠]]의 아버지) 등을 탄압했다. 1858년 13대 쇼군 이에사다의 후계자리를 놓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는 히토츠바시파와 후계자 다툼 끝에 승리해 14대 쇼군에 올랐다. 당시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더 유능하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혈통으로 따지면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먼 혈통이었던 반면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사촌에 해당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근친이라는 점에서 후계자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정이대장군]]이 되었기에 1862년까지 도쿠가와 요시요리가, 이후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 후견인이라는 명목으로 배후에 버텨서 사실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실권을 휘두르기는 힘들었다. 13살 때 쇼군이 되어 21살에 죽어서, 혼자서 뭘 결정하고 정치를 할 능력도 없었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막부 가신의 얼굴 마담 꼭두각시 쇼군이었다. 정책에 대해서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항목을 보는 것이 더 세세하다. 1862년, 16살 때 공무합체의 일환으로 [[닌코 덴노]]의 8녀이자 [[고메이 덴노]]의 이복 여동생인 [[카즈노미야 치카코]](和宮親子) 황녀와 정략결혼을 했다. 본래 [[카즈노미야 치카코]] 공주는 [[아리스가와노미야]]의 9대 당주인 다루히토(熾仁) 친왕과 약혼했으나, 공무합체 운동으로 인해 파혼되었다. 졸지에 [[네토라레]] 당한 다루히토 친왕만 불쌍.[* 근데 당시 타루히토는 26, 카즈노미야 치카코는 15였다.] 그래도 나중에 막부 토벌군 대장을 맡아서 나름 복수는 했다. 사실 과거 7대 정이대장군인 [[도쿠가와 이에쓰구]]와 요시코 내친왕의 당시 상황과 고노에씨의 의사로 혼인이 추진된 적이 있지만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일찍 죽고 요시코 내친왕이 출가해서 비구니가 된 사건이 있기는 했다. [[메이지 덴노]]는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의 이복오빠인 [[고메이 덴노]]의 아들이기 때문에 메이지 덴노의 입장에서는 고모부가 된다. 정략결혼이기는 했지만 이에모치가 간간이 선물을 하기도 하는 등 부부 사이는 원만해서, 역대 [[에도 막부]]의 [[정이대장군]] 중에서 가장 부부 사이가 좋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이 결혼을 추진한 [[이와쿠라 토모미]]는 [[존황양이]]파의 암살 위협을 받고, 한 동안 정계를 떠나 숨어다녀야 했다. 1863년, 쇼군으로서는 무려 229년 만에 [[교토]] [[니조성]]으로 상경해 [[고메이 덴노]]에게 양이를 맹세했는데, 쇼군이 상경하는 것은 [[에도 막부]]의 권위가 떨어지는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조정과는 상관없이 정책을 실행했던 쇼군 가문의 정치적 실권이 조정으로 넘어간 격이었다. 외국을 싫어하던 [[고메이 덴노]]의 조정으로부터 양이를 명 받고 어쩔 수 없이 양이를 전국의 번에게 명했더니, [[존황양이]]파가 정권을 쥐고 있던 조슈 번이 일으킨 사건이 [[시모노세키 전쟁]]. 2년 뒤인 1865년에 [[효고]]항을 개항하게 되자 조정에서 가신인 아베 마사토 등에 대한 처벌여론이 일어나, '''"쇼군직을 사임하겠다"'''고 [[고메이 덴노]]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이에 놀란 덴노는, 다시는 쇼군의 인사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866년]], [[오사카 전투]] 이래 250년 만에 쇼군이 직접 '제2차 조슈정벌'을 위해 출진했다가 [[오사카 성]]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덴노가 궁정의를 보내면서 각별하게 신경을 썼지만 결국 7월 20일 오사카 성에서 사망했다. [[카츠 카이슈]] 같은 인물은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에모치 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도쿠가와 막부]]는 망했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본래는 육촌동생인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차기 쇼군으로 지명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을 계승했다. == 기타 ==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치세는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로, [[조슈 번|조슈]]와 [[사츠마]]가 막부에 반기를 들었고 에도에서는 좌막파와 토막파의 갈등으로 치안이 불안해지는 등 혼돈이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비록 어리긴 했어도 이전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와는 달리 뭔가 해보려고 노력하긴 했다. 카츠 카이슈에게 명해 서양식 군함을 건조하게 하고, 토막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덴노의 여동생 [[카즈노미야 치카코]] 황녀와 결혼하는 등, 나름대로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가츠 가이슈는 '''"오래 사셨다면 영명한 군주가 되셨을 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이에모치 본인이 “군함을 움직일 수 있는 인재 육성이 필요하다”는 가츠 가이슈의 호소에 그 자리에서 해군 훈련소 설치를 명해 고베해군조련소(神戸海軍操練所)가 지어졌고, “해상에서의 일은 군칸부교(軍艦奉行, 가츠 가이슈)에게 맡기라”고 엄명할 정도로 가츠 가이슈를 전폭 신임했다.] 인상이 상당히 오만해 보이고 강직한 성격이었지만,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가신들이나 여성들 심지어는 동물에게도 상냥하고 자상한 면모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쇼군이 되면서 동물을 지나치게 귀여워하는 것은 체면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았다고. 어릴 적 일화로는, 유명한 서예가한테서 [[서예]]를 배웠는데, 그 선생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요실금]]을 하고 말았다. 이에모치는 이를 눈치채고 일부러 실수인 척 선생의 옷에 물잔을 엎질러서 체면을 세워줬다고 한다. 이 일화는 학교에서 학생이 쉬야를 해서 선생이 물컵을 쏟아 가려줬다는 식으로 자주 변형되어 나돈다. [[고메이 덴노]]에게 양이를 맹세한 것과는 달리, 의외로 서양과 교류를 하기도 했다.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치세 기간은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의 치세에 해당되는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미생물에 의한 [[누에]] 전염병이 돌아서 누에가 거의 전멸해 양잠산업이 파멸할 직전에 몰렸다. 그러자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이 소식을 듣고 프랑스에 일본 누에를 기증했고, [[루이 파스퇴르]]의 조언에 따라 [[나폴레옹 3세]]는 일본 누에의 연구를 지시해 누에 전염병의 원인을 연구하고 누에의 품종개량을 진행했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867년 [[나폴레옹 3세]]의 명으로 뛰어난 명마로 알려진 아라비아산 26필을 막부에 선물로 보내고 사육법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아라비아산 명마들은 [[보신전쟁]] 때 행방불명되어 종적이 묘연해졌다고. 안습. 1950년대 묘를 이장하면서 이에모치의 묘도 부인의 묘와 함께 개장되었는데, 정실 부인이었던 [[카즈노미야 치카코]] 공주의 묘 안에서 이에모치의 [[사진]]으로 추정되는 유리원판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검사를 하려고 봤을 때는 이미 유리판만 남고 사진은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일본측 위키에서는 카즈노미야와 혼담이 오갔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이 사진의 주인일 가능성도 있다고 적어놨다. || [[파일:external/stat.ameba.jp/o0400028012116941236.jpg]] 이에모치의 치아[* 31개 중 30개가 [[충치]]를 먹었음을 보여준다.] || 이에모치는 단 것을 매우 좋아해, 발굴 시 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거의 모든 치아가 충치였다고 한다. 충치가 악화하면서 [[각기병]]도 악화되었을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단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31개의 치아에서 30개가 충치였다는 것은 이상한 것으로, [[수은]]계의 독으로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암살]] [[음모론]]이 있다. [[은혼]]에 등장하는 쇼군 [[도쿠가와 시게시게]]는 이에모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분류:에도 막부 쇼군]][[분류:1846년 출생]][[분류:1866년 사망]][[분류:다이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