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조선 대원군)]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6d1b43><tablebgcolor=#fff,#191919>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D1B43, #89236A 20%, #89236A 80%, #6D1B43)" {{{#ffd400 '''덕흥대원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조선의 왕자/중종 ~ 고종)] ||<-7><tablealign=center><tablewidth=100%><bgcolor=#4eae47> '''[[도정궁#s-5|{{{#fafad2 도정궁의 역대 주인}}}]]''' || ||<width=30%> 도정궁가 역사 시작 || {{{+1 →}}} ||<-2><width=30%><bgcolor=#4eae47> '''{{{#fafad2 1대 덕흥대원군 이초}}}''' || {{{+1 →}}} ||<width=30%> 2대 [[하원군|의헌공 하원군 이정]][* 덕흥대원군의 장남이자 선조의 큰 형.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따라 피난 갔다가 피난지에서 사망했다. [[이해찬]]의 직계 13대조.] || }}} ||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6d1b43><tablebgcolor=#6d1b43> {{{#gold '''선조의 생부'''}}}[br]{{{#gold {{{+1 '''德興大院君 | 덕흥대원군'''}}}}}} || ||<width=50> '''[[시호|{{{#gold 시호}}}]]''' ||<colbgcolor=#fff,#1f2023>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2> '''{{{#gold 출생}}}''' ||1530년 4월 2일 {{{-2 (음력 3월 5일)}}} || ||[[조선]] [[한성부]] || ||<|2> '''{{{#gold 사망}}}''' ||1559년 6월 14일 {{{-2 (음력 5월 9일)}}}[br]{{{-2 (29년 2개월 12일 / 10,666일)}}} || ||[[조선]] [[한성부]] [[사직동(서울)|사직동]] [[도정궁]] || || '''{{{#gold 성씨}}}''' ||이(李) || || '''[[이름|{{{#gold 이름}}}]]''' ||초(岹) || || '''{{{#gold 자}}}''' ||경앙(景仰) || || '''[[아명|{{{#gold 아명}}}]]''' ||이환수(李歡壽) || || '''{{{#gold 부왕}}}''' ||[[중종(조선)|중종]](中宗) || || '''{{{#gold 생모}}}''' ||[[창빈 안씨]](昌嬪安氏) || || '''{{{#gold 부인}}}''' ||[[하동부대부인|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중종(조선)|중종]]의 서7남이자 [[선조(조선)|선조]]의 친아버지.[* 중종의 서자들 중에서는 제일 막내이다.] [[인종(조선)|인종]]의 이복동생이자 [[명종(조선)|명종]]의 이복형이다. 조선 왕실 '''최초의 [[대원군]]'''이다. 그리고 사실상 조선 왕실의 실질적인 [[중시조]]이며[* 실제로 [[명종(조선)|명종]] 다음 즉위한 조선의 국왕들은 모두 이 사람의 후손들이다. 이후의 대원군들인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 '''[[흥선대원군]]''' 모두 덕흥대원군의 후손이다.]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파의 파시조이다. == 생애 == 1530년 [[중종(조선)|중종]]과 [[창빈 안씨]]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덕흥군에 봉해졌으며, 13살 때 [[정인지]]의 [[하동부대부인|증손녀]]와 가례를 올렸고 그 사이에서 선조를 포함한 3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첩 사이에서 딸 하나를 더 얻었다. 어릴 때부터 주색에 빠져 2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선조 즉위 후 1569년에 대원군으로 추존된다. 성품은 다음의 기록들로 볼 때 그리 좋은 인물은 아니었던 듯 하다. >명종 13권, 7년(1552년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4월 23일(을해) 2번째 기사 >사헌부에서 덕흥군 이초를 파직시킬 것을 건의하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岧)는 성품이 교만하고 패려하여 재상을 능욕하고 사류(士類)를 구타하며 창기(娼妓)와의 사랑에 빠져 변복(變服)으로 나돌아다니고 있으니, 지금 다스리지 않으면 불의(不義)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파직시켜 마음과 행동을 고치게 하소서.” >하니, 왕이 답하기를, >“이초(李岧)가 연소하여 사체를 몰라서 망령된 행동을 하는 것인데, 파직까지야 할 수 있겠는가? 교계(敎戒)를 가하여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704023_002|출처]] 이상한 점은 명종이 오히려 4살이 어린데도 덕흥군을 '어리다'라고 감싸주고 있는 것. 어쨌든 다음은 그의 노비들이 장인인 하동 정씨 정세호의 노비들과 분쟁이 벌어졌을 당시 사관의 논평 >명종 16권, 9년(1554년 갑인 / 명 가정(嘉靖) 33년) 3월 30일(경오) 1번째 기사 >사헌부에서 덕흥군과 정세호를 노비가 투탁한 죄로 추고할 것을 아뢰다 >"덕흥군은 종실(宗室)의 무식한 사람이니 논할 것도 못 된다." >----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903030_001|여기]] 일찍 죽은 결과 자신의 3남 [[선조(조선)|하성군]]이 왕이 되는 로또를 맞았다. 주색에 빠져 일찌감치 인생 퇴갤이 된 상황에다가 자신의 부인도 죽으면서 하성군이 최적의 왕위 계승자 감이 된 것이었다. 덕흥군은 창빈 안씨 가문도 듣보잡인데다가 하성군의 생부 생모가 빨리 죽어서 명종시절 문정왕후 외척들에 시달린 신하들한테 매우 매력적인 양자 감이었다. [[제안대군]]같이 예종이 갑자기 승하해서 너무 어리거나 대신들에 의해 옹립 된 [[성종(조선)|성종]], [[철종(조선)|철종]], [[고종(대한제국)|고종]]같은 왕들은 대부분 장남도 아니었고 나이가 어린데도 왕이 된 이유는 아무래도 정통성이 떨어지고 어린 왕이 대신들이 권력도 나눠 가질 수가 있었고 다루기가 더 편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권 내내 대신들에게 훠둘리고 약한 왕권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선조는 실제 혈통으론 [[중종(조선)|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명종(조선)|명종]]의 양자가 되었기에 왕위에 오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예로 조선 9대왕인 [[성종(조선)|성종]]도 숙부인 [[예종(조선)|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하였다.] 손자들인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보다는 덜하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은 [[막장]]이다. 그러나 3남 [[선조(조선)|선조]]가 왕이 돼서 그런지 이러한 행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실록은 아무리 왕이라도 함부로 열람할수도 수정할 수도 없었기에[* 선조, [[현종(조선)|현종]], [[숙종(조선)|숙종]], [[경종(조선)|경종]]의 경우는 개수실록 또는 수정실록이라는 이름으로 본 실록 외에 다시 만든 실록이 있다. 이것은 조선의 당파 정치상 새로운 당이 집권하면 자신의 입맛에 맞게 다시 만들었으므로 곡필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 언급된 명종실록에 기록된 덕흥대원군의 몹쓸 행각은 지워지지 못하고 전해내려오는 것이다. 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왕까지 높이려고도 하지 않았고 봉사손[* 봉사손: 제사를 받드는 장손을 일컬음. 선조에게 두 형이 있었는데 큰 형의 자손들이 덕흥군 제사를 받들었기 때문에 그를 봉사손이라고 특정하는 것.]을 1품으로 세습 시키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신하들 반대로 무산되었다. [[추존]]의 예는 왕이라도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0211001_001|선조수정실록 3권 2년 11월 1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3909002_005|선조실록 203권 39년 9월 2일]] 하지만 그의 증손자 [[인조]]는 얄짤없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결국 추존하는데 [[정원대원군|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망나니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 자기 보신에는 이로울 수 있다.'''[* 총명하고 겸허하게 행동하면 신하들의 눈에 띄기 쉽고, 최악의 경우 역모 사건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적당히 사고치면서 평판을 나쁘게 해야 신하들의 눈길과 왕의 의심을 피하고 천수를 누릴 수 있다. 당장 앞 세대의 [[제안대군]]만 생각해도 일부러 사고를 쳤다는 썰이 많았다. 다만 제안대군은 이 인간과 그 후손들에 비하면 양반이다. 이쪽은 가족 문제를 일으켰지 그 외의 남에게 피해주지는 않았으니...]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수락산]]에 묘가 있다. 덕릉(德陵)으로 불리는데 원래는 잘못된 명칭으로 대원군의 무덤은 능(陵)이 아니라 묘로 일컫는다.[* 여기서 [[카더라]]성 일화 하나. 선조가 나무 도매상에게 나무꾼이 '''덕릉'''에서 왔다고 하면 후한 값을 주라고 하였고 덕흥대원군'''묘'''에서 왔다고 하면 거들떠보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3&dirId=130102&docId=107570833&qb=66aJ&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NBi1v331x0ssuoD4JRssv--499847&sid=TcjZmrPVyE0AAHhFBMM|#카더라]]. 이 일화가 반쯤 진실일 가능성이 높은게 [[당고개역]] 인근의 [[덕흥대원군]]묘 근처를 지나가는 고개 이름은 '''덕릉'''고개이고, 해당 지역에 위치한 자연부락의 마을 또한 덕릉마을이다.][* 비슷한 일화는 [[영조]]에게도 존재한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무덤은 후궁인 관계로 소령'''원'''인데, 한 나무꾼이 암행중인 영조에게 자기가 벌목한 나무를 "나랏님의 모후를 모신 소령'''능'''이 있는 양주 고령산에서 캐웠다."라고 했더니 나무꾼에게는 통훈대부 [[능참봉]]의 지위를 주었다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비록 왕으로 추존되지는 못했으나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은 [[도정궁]](都正宮)이라는 궁호를 받고 선조의 부모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의 제사를 대대로 받들었다. 도정궁 종사손은 조선시대 내내 경술국치 전까지 정3품 대우를 받을 정도로 예우를 받았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 자리했던 도정궁은 [[일제강점기]]까지 존속했다가 [[1913년]]에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 자손 == === 인물 === 정치인 [[이해찬]] 前 [[국무총리]]와 네이버 등기회사이자 라인 회장 [[이해진]],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가 있다.[* 항렬로는 이해찬, 이해진이 이봉주의 아저씨뻘이다.] === 후손들의 위상과 항렬 ===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까지 사실상 종실로 대접받을 정도로 처우가 매우 좋았다. 실제로 덕흥대원군의 3남인 [[선조(조선)|선조]](물론 선조는 법적으로 명종의 양자로 입적), 선조의 5남인 [[정원군]], 정원군의 장남인 [[인조]]의 자손들은 조선 후기에 거의 종실로 대접받는다. 보통 몇 대를 흘러가면 왕이 되지 못한 왕족들의 후손들은 일반 양반과 다를 게 없는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 조선 후기에 갈수록 왕실 직계의 손이 귀해지면서 덕흥대원군의 자손들이라면 파(派)를 가리지 않고 '''(대가 끊긴) 종친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게다가 덕흥대원군의 종손(사손)들은, [[순조]] 이후부터 [[한일합병]] 때까지 '대원군 적장손 세습제'라 하여 '''몇 대가 흘러가도 군 작위를 받는 정식 왕족으로 인정'''[* [[진안군(1752)|진안군 이언식]], [[완성군|완성군 이희]], [[완창군|완창군 이시인]], [[경원군(1842)|경원군 이하전]], [[창산군|창산군 이해창]]]받았다. 또한 1868년 3월 5일에는 흥선대원군이 아예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이면 파(派)와 상관없이 '''전부 항렬자를 통일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같은 일가친척이란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 이와 같은 케이스로, [[성종(조선)|성종]]의 자손들도 'O훈(薰)'(성종의 16세손)자 이하로 통일된 항렬을 쓴다.] >전교하기를, > >"선파(璿派)의 후손들을 하나의 족보로 닦는 것은 한 뿌리에서 천 개 가지로 나누어지고 만 갈래가 근원을 하나로 하는 것이니, 이 일은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하늘에 계신 역대 조상들의 영혼도 반드시 굽어보고 기뻐할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선조|선조(宣祖)]] 이후의 여러 계파가 [[덕흥대원군|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시조로 삼아 10여 파로 나뉘어졌는데, 모두 한 조상의 같은 핏줄이다. [[항렬]]이 각 파가 같지 않은 것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구족(九族)을 친애한다는 의리에 매우 어긋난다. '''‘응(應)’ 자 이하를 반드시 한 가지로 정하여 설사 문관(文官), 음관(蔭官), 무관(武官)으로 벼슬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이름을 고치도록 하는 일로 [[종친부|종친부(宗親府)]]와 [[이조#s-9|이조(吏曹)]]에 분부하라.''' 다른 성씨들에 대해서도 이 예에 따라 고쳐 정하는 것이 실로 또한 각 집안에서 돈독하게 하는 방도이니, 함께 거행(擧行)하도록 하라." > >하였다. >---- >《[[고종실록]]》 5권, 고종 5년(1868년) 3월 2일 경술 1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za_10503002_001|#]] 항렬은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본가인 [[인평대군]]파의 것을 기준으로 맞추었다. 흥선대원군의 항렬인 덕흥대원군 11세손 'O응(應)[* 1868년 이전의 항렬자는 'O섭(燮)', '신(愼)O', '세(世)O', 화(火)변. "섭"자 돌림은 [[선조(조선)|선조]]의 모든 자손들에서 [[경창군]]과 인흥군을 제외한 모든 파와 [[소현세자]]파, 화(火)변은 덕흥대원군파 또는 경평군파 일부, "신"자 돌림은 경창군파와 인흥군파, "세"자 돌림은 [[능원대군]]파에서 썼다.]'부터 통일되어 그 밑으로 '재(載)O[* 1868년 이전에는 '시(時)O', 'O주(周)', '중(中)O', 'O수(壽)' 토(土)변. '시'자와 '주'자 돌림은 덕흥대원군파, '중'자돌림은 인흥군파, '수'자 돌림은 [[능원대군]]파, 토(土)변은 경평군파 일부에서 썼다.]', 'O용(鎔)[* 1868년 이전에는 'O전(銓)'. [[경원군(1842)|경원군 이하전]]이 이 항렬에 속한다. 이하전은 1862년 사망해 바뀐 항렬자를 쓰지 못했으나 그의 서형 이우전은 나중에 이우용으로 개명한다.]', '해(海)O[* 1868년 이전에는 'O영(永)'.]', 'O주(柱)', '우(愚)O', 'O기(基)', '의(義)O', 'O운(雲)', '종(種)O'[* [[소현세자]]파나 [[인평대군]]파에서 벌써 이 항렬을 쓰는 후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9년판 소현세자파보와 1984년판 인평대군파보를 보면, 이 항렬을 쓰는 후손들은 1970년대부터 태어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 어쩌면 다음 항렬인 희(熙)자 항렬을 쓰는 후손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숭선군]]파의 경우는 앞서 언급한 소현세자파나 인평대군파보다 1세대나 빠르다. 1977년판 숭선군파보를 보면 '종'자 항렬을 쓰는 후손이 19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60년이 다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교(敎)자 항렬을 쓰는 후손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O희(熙)', '교(敎)O' 순으로 나간다. 다만, 현재는 이미 [[조선|조선왕조]]가 멸망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덕흥대원군 22세손 '교(敎)O' 이후부터는 파마다 항렬자를 다르게 정한다. 예를 들어 (좁은 의미의)덕흥대원군파[* [[선조(조선)|선조]] 계열이 아닌 사람들. 즉 가장 가까운 조상인 왕은 중종.]는, 'O호(鎬)', '원(源)O', 'O근(根)', '병(炳)O'으로, 선조의 자손이지만 인조의 자손이 아닌 파들은[* [[인성군]]파, [[경창군]]파 등.] 'O석(錫)', '윤(潤)O', 'O병(柄)', '영(榮)O'으로 정했다. 참고로 [[금원군]]파와 [[영양군(1521)|영양군]]파[* 둘 다 중종의 서자들.]의 항렬은 덕흥대원군파의 항렬과 같다.[* 완창대군(정확히는 [[태조 이성계|태조]]의 이복형인 영성대군)의 종파(宗派)에서도 이 항렬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덕흥대원군 후손의 양자로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금원군파의 경우 덕흥대원군의 둘째 아들 하릉군(河陵君)이 입양되어 뒤를 이었기에 사실상 덕흥대원군파로 봐야 하고, 영양군은 왕자들 중 덕흥대원군의 유일한 동복 형제였기 때문이기도 해서 그런지 후에 선조의 후손들에서 양자들을 들여온 기록이 곳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양녕대군]]파, [[광평대군]]파 다음으로 많은 후손 수를 자랑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철인왕후(드라마)/극중 설정 , version=34, paragraph=2.3)] == 매체에서 == ||<table width=500> [[파일:덕흥군01.jpg|width=100%]] || || 여인천하에 등장한 덕흥군 || * 2001년 ~ 2002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 - 조상진[br]비중이 왕자 1 정도라 별다른 존재감은 없으나 후대 임금(선조)의 아버지라는 것을 암시하듯 똑똑한 모습으로 나온다. ||<table width=500> [[파일:20161005_122545.png|width=100%]] || || 옥중화에 등장한 덕흥군 || * 2016년 [[MBC]] [[드라마]] [[옥중화]] - [[정성운]][*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 [[소현세자]], [[화정]]에서 [[숭덕제|청태종]]을 맡은 배우다.][br]큰 비중은 없다. 극 중에서 주인공 옥녀로부터 '''[[선조(조선)|자기 아들 중 하나]]가 [[왕좌|훗날 높은 자리]]에 오르리라'''는 예언을 듣는다! [[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대원군]][[분류:도정궁 종주]][[분류:서출]][[분류:1530년 출생]][[분류:1559년 사망]][[분류:전주 이씨 덕흥대원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