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clude(틀:덕수궁)] ---- [목차] == 개요 == {{{+1 德壽宮 雲橋 / 虹橋}}} [[덕수궁]]에 있었던 [[육교]]이다. ‘운교(雲橋)’ 또는 ‘홍교(虹橋)’로 불렸다. ‘운교’는 ‘구름(雲) 다리(橋)’란 뜻이고, ‘홍교’는 ‘무지개(虹) 다리(橋)’란 뜻으로, [[아치|홍예(虹蜺)]]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2개였다. 하나는 서북쪽에 위치했으며 [[경희궁]]을 잇는 [[다리(건축물)|다리]]였고, 다른 하나는 서남쪽에 있었으며 [[의정부]] 청사를 잇는 다리였다. 이렇게 [[궁궐]]과 궁 밖을 연결하는 [[육교]]를 놓은 것은 [[조선|조선왕조]]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 문서에서는 두 다리를 함께 다룬다. == 경희궁과 연결했던 운교 == ||<table width=662>[[파일:서대문 운교.png|width=100%]]|| || 경희궁과 연결했던 운교[[http://m.cha.go.kr/heri/gungDetail/gogungDetail.do?serial_number=129&detail_code=20&gung_number=4&language=&pageNo=&listFlag=list|#]] || 언제 지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자료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1898년([[광무]] 2년) 9월 7일 자 〈[[매일신문(1898년)|매일신문]]〉[*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와는 다른 [[신문]]이다.] 기사에 건립 계획이 나와있다. >[[덕수궁|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 상림원 뒤부터 [[경희궁|서궐(경희궁)]] [[경희궁 개양문|개양문]]까지 구름다리를 놓고 [[경희궁 흥화문|흥화문]] 앞부터 홍릉[*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홍릉이 아닌, [[청량리]]에 있었던 홍릉이다.]말고 까지 철로[* [[서울전차]] 노선을 말한다.]를 놓는다 하더라[* 원문: 경운궁 북문 근쳐로브터 셔궐 ᄀᆡ양문 ᄭᆞ지 구름다리를 놋코 흥화문압 브터 홍릉 ᄭᆞ지 텰로를 놋ᄂᆞᆫ다ᄒᆞ더라] 그러나 1902년([[광무]] 6년) 8월 23일 자 〈[[황성신문]]〉 기사에는 공사를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또한 [[개화기]]에 [[한국]]에 있었던 [[호머 헐버트]] 박사가 쓴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에도 운교 건설 소문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nsu977&logNo=221277940175&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이를 보아 1898년(광무 2년)에는 계획만 짰고, 공사는 이 무렵부터 진행한 듯 하다. >경운궁 안에서 서궐까지 어로를 새로 지으려는데, 홍교를 새로 설치해서 그 아래로 [[서울전차|전차]]가 지나다니게 하고 오늘부터 짓기 시작한다더라[* 원문: 慶運宮內로셔 西闕內ᄭᆞ지 御路를 新築ᄒᆞᄂᆞᆫᄃᆡ 虹橋를 新設ᄒᆞ야 其下로 電氣車가 來往케ᄒᆞ고 今日붓터 始設ᄒᆞᆫ다더라] 그러면 언제 완성되었을까. 《더 코리아 리뷰》에 따르면, 그해 10월에 운교를 이미 다 지었다고 한다. 이를 보아 약 1달에서 2달 간 공사를 진행해 완공한 듯하다.[[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nsu977&logNo=221277940175&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폴란드]] 출신 [[러시아]] 작가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한 말에 따르면, 한국인 신문균과 규마(kiuma)가 건축했다고 한다.[[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7&content_id=cp071001770001&search_left_menu=3|#]] 그는 운교에 대해 한국 건축 중 유일하게 아름답다고 평하면서도, 국가 재정이 어려울 때 세웠으며, 나라의 회계장부에 공공이익작업에 쓴 돈이라 비밀스럽게 적은 액수가 어디에 쓰였는지 보여주는 사례라며 비판했다.[[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7&content_id=cp071001770001&search_left_menu=3|#]] 이 운교를 왜 지었는지 알려주는 확실한 자료는 없다. 다만, 몇몇 기록을 통해 추론해보자면, [[대한제국]] 정부에서 [[고종(대한제국)|고종]] 즉위 40년[* 고종이 1863년에 즉위했으니 1902년이 햇수로 40년이 된다.]을 기념하여 대규모 칭경예식을 계획했고 그 행사의 일환으로 군대 사열식인 관병식을 거행하려했는데 그 관병식을 [[경희궁]]에서 열 예정이었기 때문에, 경운궁에서 경희궁으로 편하게 드나들기 위해 지은 듯하다. 당시 경희궁은 건물 몇 채 있는 것 빼고는 허허벌판이었고[* 1860년대 중반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 건물 대부분을 헐어다 자재로 썼다.], 그래서 관병식을 개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nsu977&logNo=221277940175&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그러나 사정 상 칭경예식을 여러 번 미루다 결국 영원히 치르지 못했다. 그래도 운교는 남았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간간히 [[황학정|경희궁 황학정]]에 활쏘러 갈 때 이용했다. 현재는 없으며 언제 철거했는지 확실하게 모른다. [[일본인]] 오다 쇼고(小田 省吾)는 책 《덕수궁사》에서 1908년(융희 2년)에 헐었다고 적었는데,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같은 해 8월까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 그 이후에 없앤 듯 하다.[[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nsu977&logNo=221277940175&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매체에서 === ||<table width=662>[[파일:미스터 션샤인 육교.png|width=100%]]|| || 《미스터 션샤인》 촬영장 션샤인랜드에 재현해놓은 운교[[http://www.chungnam.go.kr:8100/media/mediaMain.do?article_no=MD0001259307&med_action=view&mnu_cd=CNNMENU00009|#]] || 2018년 [[tvN]]에서 방송한 《[[미스터 션샤인]]》에 [[덕수궁|경운궁]]과 [[경희궁]]을 잇는 운교가 등장했다. 다만, 세트장(선샤인랜드) 공간 문제로 인해 실제로는 약 1.1 ~ 1.2km나 떨어진 [[종로]] [[보신각]] 바로 옆에 있는 것으로 나왔다. == 궐외각사와 연결했던 운교 == ||<table width=662>[[파일:경운궁 남쪽 운교.png|width=100%]]|| || 궐외각사와 연결했던 운교[[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on6410&logNo=22026481737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덕수궁|경운궁]] 서남쪽에 있었던 [[육교]]로, 경운궁과 궐외각사를 연결하던 [[다리(건축물)|다리]]였다. 궐외각사는 [[궁궐]] 밖에 있는 국가 주요 [[관청]]들로, 행정 편의를 위해 일반적으로 [[임금]]이 머무는 궁궐 근처에 있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on6410&logNo=22026481737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그러나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덕수궁|경운궁]]을 거처로 삼았는데, 경운궁은 원래 궁궐로 쓰던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래 [[월산대군]]([[성종(조선)|성종]]의 형)의 집과 민가였던 곳을, [[임진왜란]] 후에 잠시 [[행궁]]으로 사용한 것이 경운궁 역사의 시작이다. [[광해군]] 때는 [[인목왕후|소성대비]]의 유폐소였고, [[인조]] 즉위 직후에는 건물 2채를 뺀 나머지를 모두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 몇 백 년간 방치했던 [[궁]]이었다. 다시 [[궁궐]]로 기능하기 시작한 건 [[아관파천]] 이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머물면서부터였다.] 궐외각사가 가까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고종은 경운궁 근처에 궐외각사를 짓기로 했다. 그리고 그 부지로 경운궁 남쪽에 있던 [[서울 구 독일공사관|독일공사관]] 터를 사들였다. 그 후 1901년 ~ 1902년에 [[덕수궁 중화전|중화전]]을 짓기 위해 [[덕수궁|경운궁]] 영역을 남쪽으로 넓히는 공사를 했다. 그러면서 궁역을 궐외각사 부지까지 포함하려고 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on6410&logNo=22026481737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기존 [[덕수궁|경운궁]] 남쪽 [[담|궁장]]을 따라 나있는 길이 있었는데, 궁역을 넓히면 그 [[길]]을 폐쇄해야 했던 것. 경운궁 남쪽 길은 각국 외교공관 직원들과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에 살던 [[서양인]]들이 많이 이용하던 길이었기 때문에, 1902년([[광무]] 6년) 5월 경에 폐쇄 계획을 발표하자 심한 반발이 생겼다. 각국 [[공사]]들은 반대 의견을 냈고, 이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경운궁 남쪽 길을 없애지 않기로 했다. 대신 궁역에 포함시키려했던 [[서울 구 독일공사관|구 독일공사관]] 터와 경운궁 본궁 사이에 [[육교]]를 놓아 서로 연결시키고, 다리 밑에 [[길]]을 놓아 통행에 지장이 없게 했다. 그렇게 지은 것이 서남쪽 운교이다. 운교 건설로 인해, 고종은 경운궁 영역 남쪽 방향 확장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on6410&logNo=220264817379&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nsu977&logNo=221277940175&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이 때 확장한 궁장을 따라 만든 새 [[길]]이 바로 지금의 [[덕수궁길|덕수궁 돌담길]] [[산책로]]이다. ||<table width=662>[[파일:경운궁 확장 전후.png|width=100%]]|| || 경운궁 남쪽 궁장 확장 전(왼쪽)과 확장 후 길의 변화(오른쪽) || ||[[파일:운교 방향.png|width=100%]]|| || 운교 구조[[http://m.cha.go.kr/heri/gungDetail/gogungDetail.do?serial_number=129&detail_code=20&gung_number=4&language=&pageNo=&listFlag=list|#]] || 지금은 없으며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덕수궁]] 서남쪽에 옛 운교의 흔적이 남아있다. ||<table width=662>[[파일:운교 흔적.png|width=100%]]|| || 운교 흔적 || ---- [[분류:덕수궁]][[분류:다리(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