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덕수궁)]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c19c22><tablebgcolor=#fff,#1f202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683235,#683235 '''덕수궁 선원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왕궁의 선원전)] ---- [include(틀:대한제국 황궁의 선원전)] }}} || [목차] [clearfix] ||<table width=1000>[[파일:경운궁 선원전 터.png|width=100%]]||[[파일:선원전 복원조감도.png|width=100%]] || || 선원전 터 || 선원전 복원 조감도 || == 소개 == {{{+1 德壽宮 璿源殿}}} [[덕수궁]]의 선원전이다.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어진]][* 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진전(眞殿)이다. 쉽게 말해 [[종묘]]가 [[궁궐]] 밖에 있는,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있는 [[왕실]]의 사당이었다. [[덕수궁]] 서북쪽, 지금의 구세군회관과 덕수초등학교 맞은 편에 있었다. == 이름 == '선원(璿源)’ 뜻은 '[[왕실]]의 유구한 [[뿌리]]'로, 《[[구당서]]》의 〈열전 - 공의태자 소〉에서 유래했다. [[글자]] 뜻을 그대로 풀면 ‘아름다운 옥(璿)의 뿌리(源)’로, [[왕실]]을 [[옥]]에 비유하여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같은 뿌리’란 의미로 사용한 듯 하다.[[http://www.rfo.co.kr/seonwon_info.htm|#]][* 그래서 [[조선시대]] [[왕실]] [[족보]] 이름도 《선원록(璿源錄)》, 《선원계보(璿源系譜)》이다.][* 또한 [[전주 이씨]] [[가문]]에서 계통을 분류할 때 선원선계(왕실 역사 시작 이전[* 여기서 말하는 왕실 역사의 시작은, [[추존]]되어 엄연히 [[조선시대]] 당시 법적으로 [[임금]]이었던 [[이안사|목조 이안사]]부터를 말한다.]), 선원세계(왕통), 선원파계(왕자, 왕자군에서 갈라진 계통)로 나눈다.] == 역사 == 1896년([[건양]] 원년) 2월, [[아관파천]]으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경복궁]]을 떠났다. 고종은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할 곳을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으로 정했다. 그런데 경운궁은 애초 [[임진왜란]] 때 [[선조(조선)|선조]]가 머물 곳이 없어 [[월산대군]][* [[성종(조선)|성종]]의 형.]의 [[집]]과 그 주변 민가 몇 채를 아우른 임시 [[궁]]이었기에 [[인조]] 때 거의 대부분의 건물을 원 주인에게 돌려준 상태였다. 따라서 그런 경운궁에 머물려면 [[공사|대공사]]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1896년부터 경운궁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1년 뒤 1897년(건양 2년) 2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환궁할 당시에도 [[공사]]는 계속 진행 중이었고, 특히 중요한 건물 중 하나인, 진전 선원전 역시 완공을 못했다. 어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당시 이미 [[경복궁 선원전]]에서 [[경운궁]]의 [[덕수궁 즉조당|즉조당]]으로 옮겨와 모셨는데, 즉조당은 너무 좁은데다 다른 용도로 써야 해서 고종이 빨리 지으라고 --닦달--[[조령]]을 내려 그 해 4월 경에 공사를 끝냈다. 그리고 [[태조(조선)|태조]], [[숙종(조선)|숙종]], [[영조]], [[정조(조선)|정조]], [[순조]], [[효명세자|익종]], [[헌종(조선)|헌종]]의 어진을 봉안했다. 이 때 위치는 [[덕수궁 포덕문|포덕문]] 안쪽, 그러니까 지금의 [[태평로(서울)|태평로]] 큰 길의 일부와 [[덕수궁]] [[연못]] 언저리에 있었다.[[https://blog.naver.com/minsu977/221256780196|#]] 그러나 1900년([[광무]] 4년) [[화재]]로 선원전 건물과 안에 모신 [[어진]]이 전부 불탔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710014_001|#]] 1년 뒤 복구했는데 원래 자리에 다시 짓지 않고 [[경운궁]] 서북쪽에 있는 영성문(永成門) 안쪽의 수어청 자리에 새로 건립했으며 어진은 각 [[지방(지리)|지방]]에 흩어진 [[그림]]을 모사[* 摹寫. 베껴 그리다.]하여 봉안했다. 그래서 선원전 영역을 속칭 ‘영성문 대궐(永成門 大闕)’로 불렀다. ||<table width=600>[[파일:경운궁 영성문.jpg|width=100%]]|| || 선원전 영역의 [[정문]]이 된 영성문. [[순명효황후]](당시 황태자비)의 [[국장]] 때 [[사진]]이다. ||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이곳에서 꾸준히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1919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죽음|승하]]한 이후 [[일본 제국|일제]]가 1921년에 [[덕수궁|덕수궁(경운궁)]]의 선원전을 옮겨다 [[창덕궁]] 서북쪽 옛 대보단 자리에 짓고 새로운 선원전으로 사용하게 하면서 덕수궁의 선원전 영역은 비었다. 부지는 조선저축은행, 경성일보사 소유로 넘어갔다. [[8.15 광복|해방]] 이후에는 [[경기여자고등학교]]가 들어섰다가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소유했다. 2003년 6월 미국대사관 [[기숙사]] 건립을 위해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던 도중 덕수궁 선원전 터를 확인했다. 선원전 터를 [[용산]] [[용산공원|미군기지]] 내 부지와 맞교환하기로 합의하여 2011년 다시 [[대한민국|한국]]이 소유했다. ||<table width=600>[[파일:AKR20180801153000005_02_i_P4.jpg|width=100%]]|| || 선원전 터에 들어선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 || 이후 미국 대사관저와 선원전 부지 사이에 경계벽을 설치했다. 2017년에는 선원전 터 내에 [[아관파천]] 당시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걸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건 좀 논란이 있다.] '고종의 길'을 완공하여 일반에 개방했다. ||<table width=600>[[파일:고종의 길.jpg|width=100%]]|| || 고종의 길 || [[문화재청]]은 2038년까지 3단계에 걸쳐 선원전(璿源殿)과 빈전인 흥덕전, 혼전인 흥복전 등 주요 전각과 부속 건물(54동), 궁장(宮牆) 등을 [[복원]]할 계획을 수립했다.[[https://www.metroseoul.co.kr/article/2018061900149|#]] ||<table width=600>[[파일:덕수궁 선원전 복원계획.jpg|width=100%]]|| || 덕수궁 선원전 복원계획 || [[분류:덕수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