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pds24.egloos.com/b0103808_4f4ce22ec743e.jpg]] ||||<table align=right><#FFFFFF> '''답동 성 바오로 성당''' || || '''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인천)|중구]] 우현로50번길 2 (답동)|| || '''문화재지정'''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287호(1981년 9월 25일 지정)|| || '''종교''' ||[[가톨릭]]|| || '''주임신부''' ||김흥주 베드로몬시뇰|| || '''보좌신부''' ||류범선 루치오|| || '''홈페이지''' ||[[http://www.dapdong.or.kr/|공식 홈페이지]]|| || '''지위''' ||[[주교좌 성당]]|| [목차] 畓洞聖堂 == 개요 == [[인천광역시]] [[중구(인천)|중구]] 우현로50번길 2 (답동)에 자리잡은 [[천주교 인천교구]] 유일의 [[주교좌 성당]]이다. 정식 명칭은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 바오로 대성당'''이고, 줄여서 '''답동성당(畓洞聖堂)'''이라고 부른다. 주보성인은 '[[바오로|성 바오로]]'이다. '''[[인천광역시]]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가톨릭]] 건축물'''로 [[기독교대한감리회]] [[내리교회]][* 동인천역과 답동성당 사이 언덕에 있다.], [[대한성공회]] 내동성당[* 자유공원 인근에 있다. [[대한성공회]] 최초의 성당.]과 더불어 인천에서 유서 깊은 종교시설로 유명하다. 실제로 이 세 교회는 인천을 대표하는 가톨릭, 개신교, 성공회 교회로써 사이가 돈독한 편이고 정기적으로 연합음악회 등을 개최하는 등 [[교회일치운동]]에 모범을 보이는 곳이다. 성당 건물은 전체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1981년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287호로 지정됐다. 건축물로서도 역사적 가치가 깊지만 [[천주교 인천교구]]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현재의 성전 건물이 건축된 것은 1897년이지만 현 답동 본당의 전신인 제물포 본당[* 당시 본당 이름이 제물포였던 것은 본당 설립 시기 이 지역을 제물포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현재 [[제물포역]] 인근 수봉공원 밑에 제물포성당이 있기는 하지만, 답동성당의 전신이었던 제물포성당과는 전혀 무관하다. 현재의 제물포성당은 1970년대에 설립됐다.] 자체가 설립된 것은 [[조선]] 조정이 [[프랑스]] 정부와 수교하면서 [[가톨릭]] 신앙에 대한 자유를 허용한 후 3년이 지난 1889년이다. 인천지역 모든 [[가톨릭]] 성당의 모(母)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천교구 연혁을 보면 현재 본당으로 승격된 부평 공소(현 인천 부평2동성당)나 소사[[공소(가톨릭)|공소]](현 부천 소사성당) 등 인천시내 여러 공소가 원래 답동성당의 산하 공소였다. 그러다가 공소가 있던 지역의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답동성당에서 분가해 부평성당과 소사성당을 설립하는 등 본당이 널리 퍼지면서 오늘에 이른다. [[인천]] 지역의 가톨릭 교세가 확장되고 답동성당이 낡고 좁다는 문제가 불거지면서, "현재의 답동성당으로는 교세를 수용하기 모자라며 주교좌성당이 더 필요하다"는 비판 아닌 비판이 있다.[* [[주교좌성당]]이 꼭 하나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국내에도 [[대구대교구]], [[광주대교구]], [[수원교구]], [[부산교구]] 등 주교좌성당이 2곳인 교구들이 있다.] 실제로 제2대 인천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가 생전에 "답동성당이 협소함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 역사 == 19세기 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7대 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블랑 주교의 결정에 의해 [[제물포]]에 건립되었다.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블랑 주교는 제물포에 유진 코스트[* [[서울대교구]] [[명동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을 설계한 [[프랑스인]] 신부.] 신부를 파견하였고, 이후 페낭신학교에 있던 [[니콜라 빌렘]][* [[안중근]] 토마스 의사 및 그의 집안과 친분이 있었으며,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전 [[고해성사]]를 주었던 [[프랑스인]] 신부.] 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 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 역사적 의미에서 원래 제물포를 의미하는 지역은 현재 제물포역 인근 지역이 아니라 현 인천-동인천역을 인근으로 하는 포구지역까지 가리키는 지역명이였다.]을 1889년 7월 1일에 설립하게 된다. 빌렘 신부는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 3,212평을 매입함으로써 성전을 지을 공간을 마련한다.[* 1890년 [[용산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된 빌렘 신부에 이어 르 비엘 신부(신 바오로 1890~1893)가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해 성당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병으로 인해 휴양을 떠나면서 성전 건립은 1893년에 부임한 마라발(서요셉 1893∼1904년) 신부의 몫으로 넘어가는 등 건립을 위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후 부임한 마라발 신부는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아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성전 건립이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결국 1897년 7월 4일에 완공되었다. == [[결혼식장]] ==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과 마찬가지로 여러모로 역사와 전통, 특유의 웅장한 분위기를 보유한 성당이기 때문에 [[인천교구]] 관내 신자 중에서는 이 성당에서 [[혼인성사]] 거행을 원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종종 나온 적이 있기 때문에 답동성당에 대한 인기도 높다. [[명동성당]]은 주 10회의 혼배 미사 스케줄이 짜여 있지만 답동성당은 주 2회(토요일 오후 1시, 주일 오후 1시 30분)로 예식 스케줄이 매우 한정돼 있다. 이 때문에 답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르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렵다. [[http://www.dapdong.or.kr/cathedral/info/info1.php|자세한 혼배 미사 계약 조건은 링크를 참조하자. 보면 알겠지만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다.]] 설령 계약을 한다고 하더라도 여러 불편사항은 존재한다. 일단 주차공간이 상당히 부족하다. 마당에 주차할 수 있는 차의 대수는 50대가 채 못 된다.[* 성당 바로 앞마당과 가톨릭회관에서 성당으로 올라가는 고갯길 중턱에 주차공간이 있다. 그러나 여기를 다 합쳐도 산술적으로 60여대 밖에 주차할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교구청 신청사 앞과 답동문화관 앞에도 약간의 주차공간이 있지만 여기는 박문유치원 버스 주차장이자 교구청 상주 신부들의 전용 주차장이기 때문에 쓸 수 없다.] 장기적으로는 답동성당 관광자원화 사업의 일환으로 가톨릭회관을 철거하고 답동성당 지하 공간에 250대 수용 규모의 주차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지만 [[문화재청]]과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어 이 주차장이 언제 완성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차가 오갈 수 있는 입구가 성당 앞과 뒤에 각각 1개씩 밖에 없고 교구청 뒤쪽의 출구는 일방통행[* 신포시장 앞에서 기독병원 방향으로만 갈 수 있다. 기독병원 앞에서 신포시장 쪽으로 오려면 애관극장 앞으로 와야 한다.] 차로이며 가톨릭회관에서 올라오는 차로 또한 좁기 때문에 주차와 출차 모두 번거롭다.[* 후술하겠지만 다행히도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가 상당히 쉽다는 장점이 있다. 답동성당을 중심으로 개화기 문화재 도보관광코스도 있으니 타지 하객 중 인천시내 나들이를 원한다면 주변 지역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여기에 피로연장으로 쓰이는 답동문화관 내 식당도 꽤나 좁다. 여기에 결혼식 전날에 [[장례|상]]이라도 생기면[* 성당 사무실 바로 옆에 장례식장이 있다. 답동성당은 노인 신자 비율이 높아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주차는 그야말로 헬. 답동성당에서 결혼 예정인 신자들은 반드시 결혼 전날에 사무실에 연락해서 주차장 통제를 제대로 해달라고 확인하자.[* 혼배미사가 있는 날에는 답동성당으로 올라가는 가톨릭회관 입구 초입에서부터 주차 통제 [[아르바이트]] 요원이 통제를 한다. '만차' 푯말이 세워졌다면 실갱이 하지 말고 그냥 들어가지 말자.] 꼭 주차를 해야겠다면 신포시장 내 공영주차장 등 성당 외부의 일반주차장을 사용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한다면야 답동성당 만한 결혼식장도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인천교구]]에서는 혼배 미사를 전문적으로 치를 수 있는 본당을 최근 들어 건립해 이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막역]] 인근에 있는 동춘동성당이나 [[인천논현역]] 바로 앞에 있는 논현동성당이 그렇다.] == 역대 주임[[신부(종교)|신부]] == ||<#e3e3e3> 순서||<#dadada> 이름||<#cfcfcf> 기간|| ||1대||[[니콜라 빌렘|빌렘(J.Wilhelm)요셉]] ||1888.7 ~ 1890.10|| ||2대||르비엘(E.Le.Viel) 에밀||1890.11 ~ 1893.4|| ||3대||마라발(J.Maraval) 요셉||1893.4 ~ 1904.3|| ||4대||드뇌(E.Deneux)에우제니오||1904.4 ~ 1937.6|| ||5대||임종국 바오로[* [[한국 천주교]] 94번째 신부. 답동성당 최초의 [[한국인]] 주임신부. 이 당시는 [[천주교 인천교구]]가 설정되지 않았던 시점이었기에 [[천주교 서울대교구|경성대목구]] 소속 신부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성당의 [[종]]이 군수품으로 공출될 뻔한 상황에서 일본군 관계자에게 "종을 무기로 만들기보다 마을에 설치해 주민들이 경계태세를 갖추는 용도로 쓰자"고 제안하는 기지를 발휘해 종을 지켜낸 분이다. 1986년 선종.]||1937.6 ~ 1958.10|| ||6대||버크(J.Burke,장) 요한||1958.11 ~ 1963.8|| ||7대||설리반(H.Sullivan) 헨리코||1963.8 ~ 1968.4|| ||8대||강의선 힐라리오[* 한국 천주교 447번째 신부이자 [[천주교 인천교구]]가 1961년 설정된 이후 최초로 배출된 [[천주교 인천교구]] 소속 1호 한국인 신부(1963년 2월 서품). 현재 [[천주교 인천교구]] 소속 사제 중 서품 순번이 가장 빠르다. 현재 생존 중인 [[천주교 인천교구]] 소속 사제 중 가장 큰 어른이시다.]||1968.4 ~ 1970.1|| ||9대||박성규 베네딕도||1970.1 ~ 1975.11|| ||10대||김병상 필립보[* 한국 천주교 617번째 신부이며 [[인천광역시|인천지역]] 민주화 운동과 가톨릭계 노동 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원로 사목자다. [[문재인]]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다고 한다. 2020년 4월 25일 [[선종(가톨릭)|선종]]했으며 민주화 운동에 대한 헌신을 기리기 위해 선종 이후 [[국민훈장|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다.]||1975.11 ~ 1980.2|| ||11대||김상용 힐라리오||1980.2 ~ 1984.3|| ||12대||송주석 안셀모||1984.3 ~ 1986.2|| ||13대||강용운 시몬||1986.2 ~ 1992.2|| ||14대||정윤화 베드로||1992.2 ~ 1996.2|| ||15대||이수일 제르바시오||1996.2 ~ 2000.1|| ||16대||이학노 요셉||2000.1 ~ 2004.1|| ||17대||김용환 세례자 요한||2004.1 ~ 2009.1|| ||18대||이민주 세례자 요한||2009.1 ~ 2014.1|| ||19대||정귀호 다니엘||2014.1 ~ 2018.1|| ||20대||최경일 빈첸시오||2018.1 ~ 2020.1|| ||21대||김흥주 베드로||2020.1 ~|| == 교통 == * [[수도권 전철 1호선]] [[동인천역]] : [[동인천역]]에서 도보 10분. [[동인천역]]과 연결된 신포지하상가 29번 출구로 나오면 성당 입구인 옛 가톨릭회관 터가 나온다. *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 [[신포역]] : [[신포역]] 5번 출구에서 도보 5분. * [[인천광역시 시내버스]] : 4, 7, 9, 12, 15, 16, 23, 24, 28, 45, 72, 112, 307, 517, 519, 521번 버스 탑승 후 신포시장 정류장 하차. == 주변 시설 및 기타 정보 == 성당 바로 옆에 박문유치원이 있으며 성당 아랫편에 인천교구청 역할을 했던 가톨릭회관이 있었으나 답동성당 일대 개발 작업으로 인해 2018년 5월 철거됐다. 박문유치원 옆에는 답동문화관이라고 명명된 벽돌 건물이 있는데 답동성당에서 혼배 미사를 할 경우 이 건물 2층의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원래 성당 뒤편에 [[인천박문초등학교]]가 있었는데 [[2001년]] [[연수구]] 동춘동으로 이전했다. 이전 후 옛 학교 건물이 리모델링된 뒤 인천교구청으로 사용됐다. 교구청이 송림동 옛 [[박문여자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 건물로 이사간 후에는 가톨릭 사회사목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꽤 넓은 성당 앞마당이 있는데 과거 [[인천박문초등학교]]가 있던 시절에는 운동장으로 쓰였다가 학교 이전 후 도로를 포장해 현재는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 주차 공간은 상당히 협소하다. 대신 대중교통을 통해서도 편리하게 올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동인천역]]과 [[신포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아울러 수많은 시내버스들도 가톨릭회관 앞 또는 신포시장 앞에 정차한다.] [[인천광역시]]와 [[중구(인천)|중구]]가 적극 밀고 있는 개화기 거리 도보 관광 코스에 이 성당이 빠지지 않는데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내리교회]]와 신포시장, [[차이나타운(인천)|차이나타운]]이 있다. 주교좌 성당이기 때문에 주일에 거의 매 시간 [[미사]]가 봉헌되는데 오후 4시 미사는 [[영어]]로 봉헌된다. 인천지역에 있는 외국인 신자들을 위한 미사인데 대부분은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출신 신자들이 이 미사에 온다. [[천주교 인천교구]]에 파견된 [[필리핀인]] 신부가 영어 미사를 집전한다. 더불어 주일 밤 9시에도 미사가 봉헌되기 때문에, 낮미사나 저녁미사 참례가 어려운 이들에게는 미사 참례를 거르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분류:가톨릭 성당]][[분류:중구(인천)]][[분류:천주교 인천교구]][[분류:주교좌성당]][[분류:대한민국의 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