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왕자/중종 ~ 고종)]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bgcolor=#008000> '''{{{#fafad2 능원대군파의 역대 종주}}}''' || ||<width=30%> 능원대군가 역사 시작 || {{{+1 →}}} ||<width=30%><bgcolor=#008000> '''{{{#fafad2 1대 능원대군 이보}}}''' || {{{+1 →}}} ||<width=30%> 2대 영풍군 이식 || ||<-3><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94153e><colbgcolor=#94153e> {{{#gold '''조선 원종의 왕자'''[br]{{{+1 '''능원대군[br] 綾原大君'''}}}}}} || ||<-2><width=30%> '''[[군호|{{{#gold 군호}}}]]''' ||능원대군(綾原大君)[* 군호는 친어머니의 본관인 [[전라남도]] [[화순군]]의 옛 고을인 '능주(綾州, 현 능주면 등 화순군 서남부)'에서 유래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 || ||<-2> '''[[시호|{{{#gold 시호}}}]]''' ||정효(貞孝) || ||<-2> '''[[본관|{{{#gold 본관}}}]]''' ||[[전주 이씨|전주]](全州) || ||<-2> '''[[이름|{{{#gold 이름}}}]]''' ||보(俌) || ||<-2> '''[[자(이름)|{{{#gold 자}}}]]''' ||경숙(敬叔) || ||<-2> '''[[아호|{{{#gold 호}}}]]''' ||담은당(湛恩堂) || ||<-2> '''{{{#gold 부왕}}}''' ||[[정원대원군|조선 원종]] || ||<-2> '''{{{#gold 모후}}}''' ||[[인헌왕후|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 || ||<-2> '''{{{#gold 부인}}}''' ||문화부부인 [[문화 류씨]](文化 柳氏)[br]부부인 [[김(성씨)|영암 김씨]](靈巖 金氏) || ||<-2> '''{{{#gold 자녀}}}''' ||5남 3녀 || ||<-2> '''{{{#gold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 || ||<|2> '''{{{#gold 생몰[br]기간}}}''' ||<colbgcolor=#94153e> '''[[음력|{{{#gold 음력}}}]]''' ||[[1598년]] [[4월 11일]] ~ [[1656년]] [[설날|1월 1일]] || || '''[[태양력|{{{#gold 양력}}}]]''' ||[[1598년]] [[5월 15일]] ~ [[1656년]] [[1월 26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원종으로 추존된 선조의 서5남 [[정원군]]과 [[인헌왕후]]로 추존된 연주군부인 구씨 사이의 2남으로, [[인조]]의 동생이며 [[능창대군]]의 형이다.[* 태어난 순서로만 보면 장남이자 적자는 [[인조]], 차남이자 서자인 [[능풍군]], 그리고 3남이자 적자인 [[능원대군]], 그 다음이 4남이자 적자인 [[능창대군]]이다.] == 생애 == 1598년([[선조(조선)|선조]] 31년) 당시 [[임진왜란]]으로 아버지 [[정원군]]이 피난가 있던 평안도 성천[*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군]].]에서 태어났다. 1601년(선조 34년) 능원수(綾原守)로 책봉받았으며 6년 후인 1607년(선조 40년)에 능원군(綾原君) 군호를 받았다.[* 작호는 친어머니의 본관인 [[전라남도]] [[화순군]]의 옛 고을인 '능주(綾州, 현 능주면 등 화순군 서남부)'에서 유래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 1년 뒤인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는 아들 없이 일찍 죽은 큰아버지 의안군의 후계로 입적되었다. ~~군(君)의 양자로 들어간 대군(大君)이 뭔가 모양새가 맞지 않는 것 같다.~~[* 저 때는 [[정원군]]이 아직 추존 왕이 되기 전이라 능원대군이 아니고 능원군이었다.] 1615년(광해군 7년)에는 동생 [[능창대군|능창군]]이 억울하게 [[역모]]로 몰려 사망하고 살던 집마저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유로 빼앗기자 1619년(광해군 11년)에 아버지 [[정원군]]마저 [[화병]]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는다. 1623년([[인조]] 1년) 3월에 형 능양군이 [[인조반정|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로 즉위하였다. 1626년(인조 4년) 1월에는 친어머니 [[인헌왕후|연주군부인 구씨]]가 사망하자 예조의 건의로 그가 [[상주]]가 되었다.[* 장남인 인조가 상주를 맡을 수 없었다. 신분으로만 보면, 인조는 왕이고 연주군부인은 왕자의 아내일 뿐이었다. 실제 혈통을 떠나서 임금이 일개 종친 부인의 상주를 맡을 수는 없다는 것이 법도였다.] 이 때 수많은 신하들이 능원군은 의안군의 양자로, 연주군부인의 상을 맡아 치를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인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애초에 의안군의 양자가 된 것도 사실은 법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말로만 후사로 삼은 것 뿐이어서 능원군은 본가로 돌아가 상주를 맡을 수 있었다.[* 의안군은 혼례를 올리기도 전에 사망했기에 양자를 들이면 그 양자의 법적 어머니가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당시 법 기준으로 입양자는 반드시 [[아버지|부]]와 [[어머니|모]]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죽었든 살아있든) 존재해야 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402010_001|#]][* 출처: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11권, 1626년(인조 4년) 2월 10일 계미 1번째기사.] 이후 능원군은 상을 치르기 위해 관직에서 해임당하는 관례를 따랐다. 그러자 밥벌이가 끊겨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인조에게 도움을 받아 간신히 생활을 꾸렸다. 1632년(인조 10년) 아버지 정원군이 [[정원군|원종]]으로, 어머니 연주군부인이 [[인헌왕후]]로 [[추존]]받자 그 해 5월에 '능원'''대군''''으로 승격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인조를 옆에서 모시며 지켰고, [[김상헌(조선)|김상헌]] 등과 함께 척화론을 주장하며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나라의 어려운 일을 극복하기 위해 힘을 썼다. 그러나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강화가 성립되자 다시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으며 [[명나라]]가 완전히 패망한 소식을 듣고는 문을 닫고 통곡하며 오랫동안 식사를 걸렀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 척화파 신하들의 명단인 《명나라배신록》에 실렸다. 병자호란으로 살던 집을 잃게 되어 [[광해군]]의 옛 집이자 [[인조반정]] 이후 어머니 인헌왕후가 잠시 살았던 [[이현궁]]을 인조에게 하사받았다. 이후 1644년(인조 22년)에 일어난 심기원의 역모사건 때 이를 해결하는 공을 세웠다. == 사건사고 == 성격이 좀 나쁘게 말하면 꽤 폭력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그가 일으킨 사건사고가 제법 많다. --증조부가 [[덕흥대원군]], 할아버지가 [[하성군]], 아버지가 [[정원군]]이니 말 다했다.-- * 양아버지였던 [[의안군]]의 종이었다가 면천받아 [[역관]]으로 일하던 정영신이란 사람이 있었다. 1625년(인조 3년) 3월에 말실수했다는 이유로 능원대군에게 너무 심하게 얻어 맞아 며칠 뒤에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시대]]에는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노비]]를 함부로 죽일 수 없었으며 그랬다가는 [[양반]]이라도 엄한 벌을 받았다. 하물며 당시 시점에 노비도 아니고 양인이었던 사람을 멋대로 때려죽인 것은 아무리 [[왕족]]이라해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사헌부와 대신들은 능원군을 벌주라고 청했으나, 인조는 형식적으로만 국문을 했고 오히려 "왜 배반한 종들의 말만 믿냐? 수사를 공정하게 하지 않는다!" 라며 대신들을 나무랐으며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3022_003|#]][* 출처 :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8권, 1625년(인조 3년) 3월 27일 을해 5번째 기사.] 도리어 [[최명길(조선)|최명길]], 김주우, 윤형언 등이 왕손을 모함했다는 이유로 논죄당한데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3027_005|#]][* 출처: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8권, 1625년(인조 3년) 3월 22일 경오 3번째 기사.] 도저히 이를 보다 못한 형조판서 오윤겸이 사직을 청하는 일까지 생겼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4008_002|#]][* 출처: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9권, 1625년(인조 3년) 4월 8일 을유 2번째 기사.] 한 마디로 '''"잘못 안 한 내 동생 왜 갈굼? 너희가 더 잘못 함ㅇㅇ."'''라는 [[적반하장]](...).--말이야 방구야-- 이후 이 사건들 두고 윤순지와 김유 등은 국가의 언로가 막힐까 두렵다는 [[상소]]를 올렸고, 인조는 자신에게 지나친 면이 있었다고 사과했다. '''결론적으로 능원군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 그러나 그 뒤에도 반성을 전혀 하지 않은 듯 하다. 1631년(인조 9년) 5월에는 [[사헌부]], [[의금부]], [[형조]]에서 일하던 관리 중 하나인 어떤 금리(禁吏)와 안좋은 일이 있었던 듯 한데, 자신을 기분나쁘게 했다고 종들을 풀어 그 금리의 어머니와 아내, 장모를 붙잡아다가 [[폭행]]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905026_002|#]][* 출처: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24권, 1631년(인조 9년) 5월 26일 기해 2번째기사.] 이때 능원군은 인조에게서 추고하라는 명을 받자 오히려 화를 내며, 금리의 어머니와 아내를 또다시 가두고 한 술 더 떠 [[고문]]까지 했다.(...) 이에 더 이상 보다 못한 사헌부에서 능원군과 종들을 벌 줄 것을 청했으나 인조는 노비들만 처벌하고 '''능원군은 또 봐줬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905028_002|#]][* 출처 :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24권, 1631년(인조 9년) 5월 28일 신축 2번째 기사.] * 이건 능원대군의 직접적인 잘못은 아닌데 도의적 책임이 따르는 문제다. 1636년 [[소]]들에게 [[역병]]이 돌아 도살을 전격금지하고 어기는 자는 살인죄를 적용한다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 때문에 도살자들이 적발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노비]] 신분이 되어 멋대로 소를 도살하고 이득을 취한 적이 있었다. 이들 중 38명이 능원대군 소속 노비로 들어갔는데, 1647년 2월에 모두 적발당해 그 중 7명이 [[함경도]]와 [[평안도]] 쪽으로 온 가족과 함께 추방당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2502002_003|#]][* 출처 :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48권, 1647년(인조 25년) 5월 26일 계유 3번째 기사.] * 1649년(인조 27년) 3월에는 전국 각지에서 바치는 [[말(동물)|말]]을 중간에서 [[불법]]으로 매수하고 되팔았다. 원래 이렇게 진상하는 말들은 최고급 말인데다 조정에서 요구하는 말이 그 고을에 없는 경우, 다른 지역에 가서 얻어와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비쌌다. 이걸 이용하여 횡령한 뒤 고가의 이익을 남긴 것. 이 역시 상당히 중죄였지만 예상대로(...) 인조는 '''그냥 넘어갔다.''' --이 정도면 [[노답|답이 없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2703021_001|#]][* 출처 : 《조선왕조실록》 - 인조실록 50권, 1649년(인조 27년) 3월 21일 경진 1번째 기사.] == 사망 == 조카 [[효종(조선)|효종]]이 재위 중이던 1656년(효종 7년) 1월 1일 향년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효종은 소식을 듣고 직접 능원대군의 집을 찾아가 곡을 하였다. 이후 [[종묘]]의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에 있으며 2002년 9월 16일 [[문화재청]]에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하였다. ||<tablewidth=500>[[파일:ed562f564bb4dfcfe4525ee1f818623c213102.jpg|width=100%]] || || 능원대군의 묘. || == 가족과 후손 == 정실부인이 2명이다. 첫 부인은 [[문화 류씨]] 류효립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은 영암 김씨 김만성의 딸이다. 류씨 부인은 자녀를 여럿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어 이 부인 쪽으로는 후사가 없다. 김씨 부인은 5남 3녀를 낳았다.[* 출처 : [[송시열]] 作. 능원대군 비명.] 이후 손자만 20명, 증손자가 무려 45명으로 늘어났고 이후에도 계속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능원대군파를 이루었다. 그의 4남 영춘군의 7대손 [[이인응|이인응(이세보)]]은 [[정조(조선)|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의 양손자로 입양가 왕족 경평군(慶平君)이 되었지만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의 견제로 [[파양]]당했다. 현대 인물로는 군인이자 정치인 [[이진용(1920)|이진용]], 한국 현대 연극계의 태두 배우 [[이해랑]], 현대자동차 부사장을 역임한 이방주[* 이해랑의 아들.]가 있다. [[분류:조선의 대군]][[분류:1598년 출생]][[분류:1656년 사망]][[분류:전주 이씨 능원대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