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ffffff,#191919><tablealign=right><tablewidth=4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 0%, #000 20%, #000000 80%, #000000)" '''[[친일반민족행위자|{{{#white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br]{{{#white {{{+1 노천명}}}[br]盧天命}}}'''}}}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B9D01.jpg|width=100%]]}}} || ||<|2><width=20%><colbgcolor=#000> '''{{{#white 출생}}}''' ||[[1912년]] [[9월 2일]] || ||[[일제강점기|일제강점기 조선]] [[황해도]] [[장연군]] 순택면 비석포리[[https://bookapp.mk.co.kr/newbook_sub1_view.php?isbn=9791157952656|#]] || ||<|2> {{{#ffffff '''사망'''}}} ||[[1957년]] [[6월 16일]] (45세)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ffffff '''가족'''}}} ||노계일(부)[br]2남 2녀 중 차녀[* 언니와 오빠는 동복 형제, 남동생은 이복 형제.] || || {{{#ffffff '''본명'''}}} ||노기선(盧基善) || || {{{#ffffff '''본관'''}}} ||[[노(성씨)|풍천 노씨]][[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2918|#]] || || {{{#ffffff '''종교'''}}} ||[[천주교]](세례명 : 베로니카) || || {{{#ffffff '''직업'''}}} ||소설가, 시인, 교수, 언론인 || [목차] [clearfix] == 개요 == 사슴의 [[시인(문학)|시인]], 평생을 [[독신]]으로 고독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한국 [[문학]]에 이름을 남겼다. 뛰어난 시어 사용과 감상적인 작품으로 이름난 [[문인]]이자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 제국|일제]]의 침략 [[전쟁]]을 동조 및 찬양하고 조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몰아넣는 데 일조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대한민국]]을 배신한 [[종북주의자]], 줏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기회주의자]]로 평가받는다. 보통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기자]], [[소설가]], [[작가]], [[언론]]인으로도 활동하면서 [[친일]], [[친북]] 행위를 했다. == 생애 == 본명은 노기선(盧基善)이며 [[황해도]] [[장연군]](長淵)에서 아버지 [[노계일]](盧啓一)과 어머니 [[의성 김씨]] [[김홍기]](金鴻基) 사이의 딸로 태어났다. 1930년 3월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하여 1934년 봄에 졸업하였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해 학예부 기자로 4년간 근무하면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 <사슴>을 발표하였다. 1938년에 조선중앙일보를 퇴사해 [[조선일보]]의 학예부 기자가 되었으며 그 뒤 4년 동안 조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여성(女性) 지의 편집인이 되어 여성지 편집을 맡아 보았다. [[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 친일 [[문화]] 단체인 '조선 문인 협회'에 가입하여 전쟁을 찬양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선동]]하는 시를 발표하였다.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문화부 기자가 되어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노래하자 이날을', '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 다수의 친일 시를 발표했다. 노천명의 대표 친일시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가 있는데 아래가 그 내용이다. ||남아면 [[군복/일본군|군복]]에 [[아리사카|총]]을 메고 [[일본 제국|나라]] 위해 [[중일전쟁|전]][[태평양 전쟁|장]]에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반자이 어택|창검을]] [[대전차총검술|휘두르며]] [[자살|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대동아 공영권|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귀축영미|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장송곡|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등에 [[강사]]로 나가 출강하였으며 후에 부녀 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기도 하였는데 1946년까지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있었다. 1949년에는 몇 편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피난하지 못한 노천명은 [[월북]]한 [[임화]], [[김사량]] 등이 주도하는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 궐기 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특별시|서울]]을 수복한 뒤 [[좌익]] 분자 혐의를 받아 [[징역]] 20년을 선고받으나 여러 문인들의 도움으로 몇 개월 만에 [[사면]]하여 풀려났다. 이후 공보실 중앙 [[방송국]] 방송 담당 촉탁에 임명되기도 하고 3차 시집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지만 무리한 집필 활동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1957년 재생 불능성 뇌빈혈로 [[사망]]했다.[* 노천명의 [[시신]]을 수습한 법관 [[김홍섭]](1915년~1965년)의 회고에 따르면 몇 권의 책과 앉은뱅이 책상 외에 변변한 가재 도구도 없는 손바닥만 한 낡은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어 [[교회]] 신자들이 수습해 줬다고 한다.] 결국 노천명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노천명은 총 14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으며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http://ko.wikipedia.org/wiki/%EB%85%B8%EC%B2%9C%EB%AA%85|위키 백과]]. == 성격 == '여자 [[김동인]]'이었다. 근대 [[남성]] 작가 최악의 [[성격]] 파탄자가 김동인이라면 여성부 챔피언은 단연 노천명이다. 도도함을 넘어 오만불손하고 독선적이며 기회주의자의 성격이었다. 본인의 시 [[자화상]]에서 스스로를 '대처럼 꺾어는 질 망정 구리 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이라 했지만 [[분노조절잘해|자기보다 세면 얼마든지 휘어졌다.]]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성격으로 동료와 자주 충돌을 일으켰는데 같은 여성 문인들과는 친하게 지냈으나 남자들에게는 결벽스러울 정도로 냉정했다고 한다.[* 다만 한 사내에게는 예외였는데 바로 당대 최고의 [[미남]]이자 남녀 불문 [[조선]] 문인들의 [[아이돌]]이었던 [[백석(시인)|백석]]. 노천명은 그를 바람직한 시인의 [[모델]]이자 자신의 [[이상형]]으로 봤으며 대표작 사슴이 백석에게 보내는 연시라는 해석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노천명의 도도함이란 기실 세태에 따라 얼마든지 꺾어지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절대 강자인 [[권력]]에는 발휘되지 못하고 철저히 굴복하여 [[민족]]을 팔아먹는 친일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노천명은 남자들에게 결벽스러울 정도로 냉정한 자세와는 다르게 일제에는 지조없는 비열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6.25 전쟁 당시 [[북한군]] 치하와 서울 수복 후 국군 치하에서 보인 그녀의 처신을 보면 노천명은 [[약자]]나 만만한 자에게는 오만하게 굴고 [[강자]]에게는 철저히 순종하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임을 알 수 있다. 노천명 본인 말과는 달리 '자신의 위기 앞에서는 대처럼 꺾어지지 않고 구리처럼 휘어진 것'이다. 특히 노천명이 얼마나 비열하고 뻔뻔스러운 성격을 가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이윤옥]] 시인에 따르면 노천명은 해방 전인 1945년 2월 25일 시집 "창변"을 펴내고 성대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는데 그 시집에 친일시 9편이 수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광복이 되자 노천명은 시집 "창변"에서 친일시 9편을 제거하고 계속 출판했다고 한다.[[http://blog.naver.com/simontek/30152196907|친일파 시인, 우리가 사랑하였던 노천명의 친일 진면목]] == 평가 == [br]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fffff><bgcolor=#ffffff>{{{#!wiki style="text-align: center" {{{+2 '''사 슴'''}}} {{{-2 노천명}}}}}}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은 노천명의 독특한 향기이다. 당대 유명했던 여성 문인([[모윤숙]], 최정희)와 함께 여성이 작가의 대상에서 머물지 않고 주체로 나갈 수 있음을 보여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노천명은 뛰어난 시적 감각을 지녔으며 여성 문인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점은 있다. 그러나 노천명의 비정치적 채취는 자신의 형편에 따라 변해서 후에는 철저한 정치적 친일 선동에 앞장섰다. 그러므로 그녀의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일 행위까지 용납할 수는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또 그 친일 행위도 단순히 한 두 시를 발표한 것이 아닌 수 많은 친일 시와 글을 지속적으로, 그것도 한국 젊은이들을 징병과 징용에 적극적으로 밀어 넣은 매우 질이 나쁜 것임을 봤을 때 소극적 친일파로 볼 수도 없다. 한편 노천명, 모윤숙, 최정희 3인방은 사이가 너무 좋은 나머지 같은 시기에 친일파로 변절하기도 했다. 노천명의 친일 행위가 얼마나 확실한지는 유종호 문학 평론가가 '시인 세계' 에서 '마지못한 친일까지 중죄인 취급은 가혹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서 거론하는 28명의 문인 중 시인으로는 [[김동환(시인)|김동환]], [[김소운]], 김안서,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주요한]] 등 8명이다. 이 중 김동환과 노천명을 제외하면 교과서에 올릴 만한 작품이 별로 없다.'고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 김동환과 노천명은 친일 시인 중 선별적으로 구제론을 펼치는 사람까지도 등을 돌릴 정도의 명백한 친일을 한 것이다. [* 사실 그 김동환과도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 김동환은 그나마 반민 특위에 자신의 친일 행위를 자수했고, 김동환의 아들이 아버지의 친일 행위를 분명히 사과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 데 반해 노천명은 그런것도 없는 데다가 해방 이후에도 계속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보인 터라 쉴드 받을 일이 앞으로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1933.html|2006년 2월 13일 한겨레신문]] 결국 교과서와 수능에서 이후도 나오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중요 악질 친일파를 논할 때 항상 언급되는 노천명은 결국 친일 인명 사전의 주요 친일파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친일 인명 사전 등재 때 일부 친일파는 이의 제기가 있었으나, 노천명은 당연히 그런 논란이 없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행한 친일 행위 및 좌익 단체인 조선 문학가 동맹 활동으로 볼 때 기회주의 지식인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역시나 [[월간조선]]에서는 좌익 활동했다며 친일파를 곁들어 그녀를 비난한 기사를 썼다. 그러나 월간조선은 그동안 우익 친일파를 옹호해 왔던 터라, 좌익 친일파만 욕하고 우익 친일파는 두둔하는 이념적으로 편향적 행보이라는 비난만 듣었다. == 이야깃거리 == * 원래 [[본명]]은 기선이었으나 어렸을 적 병으로 인해 사경을 넘긴 뒤 천명(天命)으로 개명하였다. * 냉정한 성격으로 인해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고 연애도 거의 하지 않았으나 연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한때 보성 전문학교 교수인 [[김광진(북한)|김광진]]과 연인 사이였으나 그는 유부남이었고, 끝내 결별한 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다. * 당대 같은 여성 문인인 [[최정희]]와 [[모윤숙]]과는 매우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특히 최정희에게 보내는 편지인 [[나를 대구로 데려가 주]]를 보면 노천명이 최정희에게 떼를 쓰는 표현을 엿볼 수 있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노천명, [[최정희]], [[모윤숙]]은 친일 행위에서도 그 우정을 발휘하여 일제의 우리 문인 회유 단체인 조선 문인 협회에 1942년에 가입한다. 즉 반민족 악질 친일파로도 세 여성이 어깨 동무를 한 것이다.[[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3&contents_id=6979|네이버캐스트]] 이 중에서 최정희는 앞서 언급된 친일파 [[김동환(시인)|김동환]]과 동거하면서 2명의 자녀를 두기도 했다. * 노천명은 잘 알려진 [[서정주]]의 '오장 마쓰이 송가'보다 더 먼저 '신익'이라는 시를 발표해 조선인 출신 [[카미카제]] 특공대가 되었던 마쓰이를 칭송하기도 했다. [[http://blog.naver.com/simontek/30152196907|네이버 블로그]] * 방송인으로도 활동했었다. 자세한 건 다음 링크를 참조. [[http://blog.daum.net/jc21th/17781347|#]] == 관련 문서 == * [[사슴]] * [[매국노]] * [[친일반민족행위자]] * [[기회주의자]] * [[모윤숙]] [[분류:이화여자대학교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실향민]][[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문화, 예술]][[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문화]][[분류:장연군 출신 인물]][[분류:풍천 노씨]][[분류:1912년 출생]][[분류:1957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가톨릭 신자]][[분류:뇌혈관질환으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