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회원수정2)] ||<-2><tablealign=right><bgcolor=#dcdcdc> {{{+3 '''노덕술'''}}}[br]盧德述 || ||<-2>[[파일:노덕술.jpg|width=100%]]|| || '''생몰년도''' || 1899년 6월 1일~ 1968년 4월 1일 || || '''출생지''' ||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울산군]] 대현면 [[장생포]]리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경찰 간부. 일제강점기 당시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츠우라 히로(松浦鴻).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인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http://orbi.kr/bbs/board.php?bo_table=united&wr_id=4669522&tags=%EC%B6%94%EC%B2%9C|링크]] == 생애 == 울산 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인 상점에서 일하다가 돈을 더 벌기 위해 [[홋카이도]]로 건너가서 일했다고 한다. 귀국 후 1918년 경찰이 되기 위해 경남순사교습소에 지원하여,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를 졸업, [[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 소속으로 경찰 근무를 시작하여, 사법계에 근무하면서 1921년에는 순사부장이 되었고 1924년 경부보, 1932년 경부, 1943년 경시로 진급하여[* 일제 시기 경시를 단 사람은 35년 지배 기간 동안 21명뿐이었다. 즉 노덕술은 친일을 해서 올라갈 수 있는 곳 그 이상을 간 것이다.], 1944년 수송보안과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고등계]]의 [[형사]]로서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했는데, [[불령선인]]으로 찍힌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 취조하는 데에 앞장섰으며 고문치사한 사람까지 나왔고, 고문 취조를 통한 건수 올리기로 일사천리로 승진가도에 올랐으며, 일제로부터 훈8등서보 같은 수훈을 받았다. 어찌나 악랄했던지 민중들 사이에도 '''친일 고문 경찰=노덕술'''이라고 인식될 정도. [[장택상]]은 차라리 이 사람보단 양반이라고 인식될 정도다.[* 그런데 이 사람을 출세 시켜준 장택상은 굳이 나누자면 항일 운동가였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나온 이유는 미군정 시기 장택상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노덕술을 능가할 악질로는 고문 전문인 [[하판락]]이 있는데, 하판락은 인지도에서 노덕술만 못하다.[* 물론 항목을 보면 알지만, 하판락도 노덕술과 같은 행보를 걸었다. 일제강점기의 악행, 반민특위 체포, 습격으로 탈주, 이후에 잘 먹고 살다가 친일명단에 등재됐다.] 1927년 노덕술은 좌우연합 단체인 신간회 간부 박일향을 잡아들어 무자비하게 고문했고, 이때 노덕술에게 고문받고 죽은 독립운동가가 3명이나 듼다. 1928년 혁조회가 적발되었을 당시 노덕술은 혁조회의 회장 [[김규직]]을 비롯한 9명등을 잡아들여 고문했고, 고문받았던 [[김규직]], [[유진홍]], [[양정욱]]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32년 5월 당시 ML당원인 [[김재학]]이 메이데이 시위행렬에 참가했다가 잡혀 노덕술에게 천장에 매달려 구타를 비롯한 숱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김재학]]의 조카 김문한 씨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하여간 [[통영]]에서 엄청나게 잡혀가지고 제일 많이 고문한 사람들이 허가비 '''노덕술이''' 한경부 이런 사람들이야. 솔직히 말하면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쯤 죽여 버리지요. 뭐." >---- >악인열전 p.133 이 뿐만 아니라 1938년 혜산 사건을 수사하며 박달과 박금철[* 이 둘은 훗날 북한 초기 정치 세력 중 하나인 '갑산파'의 일원이 되었다.] 등 조국광복회 소속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최연]], [[고등계]] 형사로서 독립 운동에 대한 사찰 업무를 맡은 [[최운하]] 역시 노덕술과 같은 반열에 든다. 심지어 그의 외삼촌이 살인혐의가 있는데도 놔주거나 수사를 목적으로 금품을 수수하는 등 부패한 면모를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84216#06wC|보였다.]] [[8.15 광복|해방]] 이후 잠시 [[평양]]경찰서장을 맡고 있던 중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1945년 말에 월남하였고, 다음 해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하였다. [[장택상]]과 더불어 [[여운형]] 암살 배후로 거론되기도 한다.[* 직접 암살한 것은 아니지만, [[여운형]]이 지속적으로 테러를 당할 때 경찰임에도 테러범을 봐주고 고의적으로 방관함으로써 암살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노덕술은 암살범들하고 비밀리에 서로 짜고 '단독범행'으로 축소하는 데 커다란 일조를 했다.] 1946년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암살범 [[한현우]] 등 일당들을 검거함으로써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았고, [[이승만]]에게서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러는 와중에 독립 투사 중 최고 거물이었던 [[김원봉]]을 체포, [[김원봉]]의 뺨을 때리는 등의 치욕을 주어 그가 [[월북]]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49년 1월 26일 공범 [[백민태]]의 자수로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파일:노덕술.png]] 공판에 출석하는 노덕술 노덕술은 지명수배 상태에서도 번호판을 단 경찰 지프에 경호원까지 대동하여 다녔고 내무부장관 [[윤치영]]이나 외무부장관 [[장택상]] 등의 집을 방문하여 "내가 잡힐 줄 아느냐"며 큰소리도 쳤다고 한다. 결국 동화백화점 사장 이두철의 집에서 검거되었는데 권총 6자루와 다량의 실탄, 현금도 34만 1천 4백 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062200329205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6-22&officeId=00032&pageNo=5&printNo=9763&publishType=00020|경향신문]]. 반민특위 조사기록에 따르면 1949년 노덕술의 재산은 60~70만 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80킬로그램 쌀 8만 가마를 살 수 있고, 현재 시세로 하자면 1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모은 셈이다.[* 출처 악인열전 p.137]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이 체포되자 노덕술은 그저 기술자일 뿐이라며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직접 만나 그의 석방을 종용했고[[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81400289122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08-14&officeId=00028&pageNo=22&printNo=2312&publishType=00010|##]] 공보처장 명의로 '정부인사의 조사를 중지한다'고 공포하고 특위법의 개정까지도 시도하는 등 특위 활동을 방해하였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02500329115001&editNo=20&printCount=1&publishDate=1994-10-25&officeId=00032&pageNo=15&printNo=15236&publishType=00010|##]]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2180032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2-18&officeId=00032&pageNo=1&printNo=736&publishType=00020|이에 대한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과 부위원장 김상돈의 당시 국회 증언]] 노덕술은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어 바로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하였고, 이후 군에 장교로 입대하여 [[군사경찰|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였으며[* [[이근안]]은 군인에서 경찰로 변신했다.] 1950년에는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 1954년 부산 제2육군 범죄수사단장, 1955년 서울 15육군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내는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주로 대공수사 업무를 담당했다. 그의 일화 가운데 [[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1/05/021075000200105220360052.html|유명한 것]]은 '[[저놈 잡아라!]]'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박종철 사건|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의 롤모델 격이며, 1948년 초에 벌어진 [[http://db.history.go.kr/url.jsp?ID=dh_006_1948_01_24_0090|장택상 피습]] 사건의 용의자 임화를 고문하던 중, 임화가 수사관의 폭행으로 인해 사망하자 시체를 몰래 얼어붙은 [[한강]]에 구멍을 내고 유기한 후 노덕술이 취조실 창문을 열고 "저놈 잡아라!" 라고 외치며 임화가 도망간 것으로 둔갑 시킨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저놈 잡아라!]] 문서를 참조. 2016년 7월, [[뉴스타파]]의 탐사보도에 따르면 노덕술은 놀랍게도 이 시기 [[대한민국 훈장|충무무공훈장]]을 비롯하여 무공훈장 세 개를 받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그 악행을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았던 인물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처벌은커녕 훈장을 받았으니... 이후 특무대장 [[김창룡]]과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다 [[이승만]] 눈밖에 나면서 날개가 꺾인 노덕술은 1956년 군에서 예편한 후 고향 [[울산광역시|울산]]으로 내려가 칩거하다가,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울산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4만 1109명 중 1744표(4.24%)만 얻어 전체 후보 여덟 명 중 여섯 번째로 낙선(무소속 [[정해영(정치인)|정해영]] 당선) [[크리]]를 먹었다.[* 당시에는 친일파라 해도 고향의 인재라면 뽑아주는 게 보통이었고 개중에는 상당히 질이 나쁜 놈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노덕술이 이렇게까지 망한 것은 그가 얼마나 인망을 잃었는지 보여준다. 즉 반민특위의 처벌은 면했지만 세상의 처벌은 면하지 못한 것. 심지어 본인을 반민특위의 처벌로부터 구해준 은인인 [[이승만]]의 눈밖에 나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쓰라린 업보를 치른 셈이다.]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5년 불법 흥신소를 운영한 혐의로 체포당하여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이때 앓던 지병이 악화되어 결국 1968년 4월, 서울 종로구 궁정동 22-1 자택에서 죽었다. 그의 나이 68세 때였다. 비슷한 경우로 [[김창룡]]이 있다. 노덕술이 공산게릴라의 공격에 대처할 치안전문가가 필요하여 [[이승만]]이 빼준 인물이었다면 [[김창룡]]은 군내 좌익 숙청을 목적으로 고른 인물이었으니 맡은 임무도 비슷하고 둘이 초래한 부작용도 비슷했다. 차이점이라면 권력 투쟁에서 밀린 노덕술은 자택에서 병사하고 이승만의 총애만 믿고 사방에 적을 만들었던 [[김창룡]]은 56년에 암살당했다는 점이다. 5공 시절 치안본부(현 [[대한민국 경찰청]]) 대공수사단장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를 진두지휘했던 [[박처원]] 치안감과도 인연이 깊다. 물론 [[박처원]]은 이 사건으로 결국 감옥에 갔다. 2014년 울산의 인물 후보로 선정되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2&aid=0000454135|논란이 일었다.]] 선정 기준은, 울산 출신이며,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공헌한 사람으로서 활동 여부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이 후보로 선정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후에 당연히 취소되었다. == 대중매체에서 == === 드라마 ===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신충식]]이 연기했으며, 1990년 광복절 특집드라마 《반민특위》에서도 동일 배역을 맡았다. * 2006년작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선 노덕술과 [[김창룡]]을 모티브로 가상의 악역 박창주([[박상면(배우)|박상면]])가 역할을 대신한다. 예외로 34회에서 딱 한번 등장하는데 계급상 박창주보다 훨씬 상관.배우는 윤관용. * 2019년작 MBC 드라마 [[이몽(드라마)|이몽]]에서 나오는 친일경찰 노정술이 이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 [[야인시대]] ==== [[파일:external/postfiles11.naver.net/Screenshot_2015-11-25-00-31-32.png|width=50%]] [[야인시대]]에서는 서영탁[* 본명은 서동근으로 여러 대하사극에서 조연과 단역을 맡았다. 2017년 사망.]이 배우로 등장하는데 [[이정재(야인시대)|이정재]]의 찌질한 상관으로 등장하며 사실상 이정재를 다시 주먹사회로 돌아가게 만든 원흉이자 동대문파 탄생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두한(야인시대)|김두한]], [[유진산(야인시대)|유진산]], 이정재를 비롯한 [[반민특위]] 암살 기도를 했다가 암살을 맡긴 [[백민태]]가 항일 극렬 [[테러리스트]]였기에 그대로 자수해서 이정재에게 체포당한다.하지만 [[이승만(야인시대)|이승만]]에 의해 노덕술은 풀려나고 [[주객전도|오히려 이정재가 체포를 당해 고문을 당하고]] 이 일을 계기로 이정재는 정치권에 환멸을 느껴 [[형사양반|경찰]]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이정재는 김두한과 가진 술자리에서 억울하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정재(야인시대)#s-1.2|그리고...]] 미약하나마 정의감을 지닌 이정재를 타락시킨 결정적 인물임은 틀림없다. 고문 당하고 비참하게 경찰서를 나가는 이정재를 보면서 득의양양했으나[* 이에 분노한 이정재에게 "어이 친일파! 그래, 더럽고 분하지만 네 말이 맞다. 네 말이 맞다 이 새끼야!"라고 까이고 침세례까지 받았다.] 얼마 후 자기 부하였던 [[곽영주(야인시대)|곽영주]]가 이승만의 눈에 들어 고속으로 승진하는 걸 보고는 똥 씹은 표정이 되고 곽영주에게 오히려 굽신거린다. 6.25 전쟁 이후 에피소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합성물에도 가끔 등장하고 있다.[* 특히 이정재가 노덕술에게 침 뱉는 장면이 많이 쓰인다.] ==== 관련 문서 ==== * [[야인시대/등장인물]] === 기타 창작물 === * 2015년작 영화 [[암살(영화)|암살]]에서의 맨 마지막 장면에 반민특위에서 재판을 받은 후 석방된 염석진이 노덕술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의견이 많다. 노덕술은 이후 떵떵거리며 잘 살았지만 염석진은 안옥윤과 명우의 총탄에 사살된다.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을 대리만족시킨 것으로 보인다. * 웹소설 재벌강점기에서는 현대의 토지대장 건으로 나오마사를 만나고 있던 어진에게 [[커피|가배차]]를 내온 신입 순사보로 등장. 이화관에 와서 소담에게 치근덕대는 바람에 [[망했어요]] 루트를 탔다. 거물 기업가의 부인을 건드린 파렴치한 놈이라는 낙인이 찍혀 순사보 자리에서 짤리고, 소담에 의해 양쪽 검지손가락이 다 잘린 뒤 모르핀에 취해서 빈민가에서 난동을 피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뒤로 등장이 없을 줄 알았으나...[* [[이승만]]의 제안으로 어진의 저택에 비행기 자폭테러를 일으켰고, 핀을 뽑은 수류탄을 쥔 채 어진과 동반자살을 꾀했으나, 어진이 그대로 벽장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바람에(칼이나 전기 충격기, 수류탄처럼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물건은 벽장 반입 금지) 본인만 사망.] == 수상경력 == * 공로상신 (1940) * 훈8등서보 (1941) * 화랑무공훈장 (1950, 1951) * 충무무공훈장 (1953) [[분류:경찰공무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경찰]][[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통치 기구]][[분류:1899년 출생]][[분류:1968년 사망]][[분류:남구(울산) 출신 인물]]